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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Dec 18. 2020

대학 중퇴, 그리고 십년 후 대학원 입학

한국방송통신대학원 MBA에 합격했다.

 

 2008년 삼월.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터덜터덜 경사길을 내려왔다. 대학을 보내주지 않으면 엄마와 인연을 끊겠다며 울고불고 입학한 게 허탈할 정도로 학교를 그만두는 일은 간단했다. 학교 근처 PC방에 앉아 어떤 회사든 먹고살기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잡코리아에 접속하던 날.

 꽃샘추위가 참으로  끝을 시려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던 그날은 12 오늘보다 유독 추웠다.




 다시 공부를 할 순 있을까.


 난한 내가 다시 학교라는 문턱을 밟을 순 있을까. 밤 여섯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술집에서 알바를 하고 아침 수업을 졸며 악착같이 학교라는 끈을 잡고 있었던 것은 부질없는 내 어린 고집이었을까. 애초에 처음부터 학교가 아닌 직장을 선택했으면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 없이 사회생활을 만끽하고 있지 않았을까.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게임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어서, 혹은 DVD가 닳을 때까지 반지의 제왕을 돌려보며 나도 저와 같은 대작을 만드는 작가의 일원으로 일해보고 싶어서 들어갔던 학교였다. 과에서 배우는 것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몰랐던 지식을 얻게 되고, 영상 장비를 만지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처세술도 배우고, 문학 작품과 영화를 보는 눈을 키워가고, 밤을 새워서 과제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며 언젠가 나도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방학이면 글도 쓰곤 했었다.


 그런 모든 것이 한순간 종이 한 장에 끝나다니. 내 부모님이 울며불며 자신을 불태워 내게 쏟아부은 시간이 한순간 물거품이 됐다. 내 삶도 사라졌다고 느꼈다. 친구가 보낸 "나 이번 과제 B 밖에 못 받아서 속상해."라는 말에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며 고양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내게 남은 건 열등감과 원망, 그리고 빚이었다.


 내게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저 먹고사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학교도 졸업 못하고 그게 뭐하는 짓이냐."라는 친구들의 핀잔에 입술을 깨물고 내 모든 걸 회사로 돌렸지만, 가슴에 난 구멍은 아무것도 나를 채워 주지 못했다.

 일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어서 여기저기 떠돌다 강사로 발령이 났다. 사내 지식을 신입 사원에게 알려주는 것이니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내 곁에 앉아 계시는 실장님의 책상엔 책이 늘 1미터는 족히 쌓여 있었다. 경영서나 자기 계발서를 주로 읽으시긴 했지만, 매주 실장님의 책은 바뀌어 갔다.


 '아, 나도 한 때는 책을 좋아했었지.'


 괜히 씁쓸해졌다. 학교를 그만둔 지 어느덧 삼 년이 됐지만, 난 여전히 엉망으로 사는 것 같았다. 언젠가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으며 내려왔던 경사길. 실장님의 책을 조금씩 빌려 보며 어느덧 그 분과 대화 나누는 것이 즐거워졌고, 이렇게라도 배울 수 있다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좋은 선배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동시에 좋은 기회가 되어, 회사에 특강을 온 안병민 대표님의 마케팅 강의를 듣고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지를 깨닫고 세상에 눈을 돌렸다. 외부 강연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고, 2년은 열심히 외부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니며 내가 몰랐던 세상을 배우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또다시 나는 많이 정체되어 있었고, 뒤쳐졌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져 자학과 원망을 번갈아가며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것 같다.


열심히 살고 싶어서 이것저것 계획은 잔뜩.





 그러나 그 경험은 지금의 내게 무척이나 필요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배우지 못해 치열하게 배우고자 했고, 알지 못해 나를 낮추고 배움을 구해야 했다. 코칭을 배우고, 퍼실리테이션을 배우고, 마케팅을 배우고, 협상을 배우고, 교수법을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고민하고 삶을 알아가는-책뿐만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 가며 배우는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내 이름 앞에 붙어있는 대학 중퇴, 아니 고졸. 어디 가서 명함조차도 내밀지 못할 나라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또 열등감에 허우적 대는 내게, 선배이기도 하면서 지금의 팀장님이 내게 대학을 권유했다. 여러 차례 학점 은행제를 생각도 했지만 엄두도 나지 않았고, 고가의 비용이 하루하루를 벌어먹고 사는 내게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런 내게 팀장님은 2년간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어떤 결심이 섰던 것은 아니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서 야근과 출장이 잦은 내게 야간대 조차도 사치이니 방송통신대학교의 경영학과로 편입했다.



날 끝까지 힘들게 했던 회계

 그간 대학교 점수는 인플레가 높았던 걸까. 수포자인 내게 경영학과의 숫자는 내게 참으로 힘든 산이었고, 중간 과제물보다 OMR 카드로 치는 기말고사는 울 것 같았다. 3학기를 꾸준히 F와 싸우다 보니 내가 사실은 너무 멍청하고, 배움에 대한 열망도 사실은 깊지 않았던 건 아닐까- 자기 의심까지 했다. 너무 지쳐서 이대로 그만둘까 상담도 하고 고민도 하며 엉엉 울었지만, 네팔 트레킹처럼 꾸역꾸역 걷다 보면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듯, 언젠가는 졸업하겠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결국 성적은 솔직해서 한 학기를 더 다니긴 했지만, 마지막 학기는 두 과목을 빼고는 A와 A+로 졸업할 수 있게 됐다.

 

 원하던 대학 졸업장을 받았으니 이제 그만둬도 된다. 홀가분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여운. 내가 대학을 졸업할 동안 팀장님께선 대학원 석사를 마쳤고, 그 모습은 좋은 자극이었다. 나도 내가 몸담은 조직과 리더십에 대한 고민을 연구하고 논문으로 쓰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원은 오프라인으로 다니는 게 좋다고 하며, 방송통신대학원에 편견과 페널티가 있다는 말도 해줬다. 그러나 나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던 날 대통령이 남겨준 축사 "성실의 증명서"를 기억하며 이 곳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다.


 간당간당한 성적에 어설픈 면접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일주일을 보냈는데 오늘 드디어 합격 문자를 받았다.


 


 요즘엔 대학원도 아무나 간다고 대학원이 대수냐 싶겠지만, 내겐 무려 15년 만이다.


 만개한 벚꽃이 핀 캠퍼스를 뒤로한 채 쓴 눈물을 삼키던 스물셋의 빈털터리 청년이 감히 꾸지도 못했던 꿈이 아니었던가.

 

 네팔에서 비행기를 타지 못해 쿰부를 향해 3일 밤낮을 걷듯- 아주 많이 돌아오고, 아주 많이 걸어온 시간. 남들처럼 가지 못해서 엉엉 울었던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 캠벨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걸어가야 할 다른 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2017.10. 남들보다 두배는 멀게 돌아갔던 참 멀고 멀었던 EBC로 가는 길.



 오늘은 진심으로 축하하고 감사하고 싶다.

 포기하지 않고 가장 어둡고 길도 나있지 않은 길로 걸어왔던 내게, 그 숲으로 날 떠밀었던 삶에게.  그리고 그 여정 내내 나와 함께 해준 가족과, 친구들과, 내가 만난 수많은 스승들에게.

 

 꿈속에서만 가능했던 삶을 지금 살고 있도록 해 주어서. 진심으로 가슴 깊이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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