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소리 내어 엉엉 울며 나를 쫓아오던 엄마의 모습이다. 나는 어린 막내 손을 꼭 붙들고 치기 어린 마음에 화를 내고 집을 뛰쳐나왔다. 엄마는 우리랑 따로 살고 있었고, 종종 엄마집에 막내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날은 내 대학 입학학비로 언성이 크게 오갔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무슨 돈이 있었겠나. 난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학교를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도 분하고 억울했고, 그 분노를 엄마에게 쏟아냈다. 집을 뛰쳐나오던 나도, 영문도 모른 채 누나에게 손을 잡혀 끌려 나오던 막내도, 우리를 뒤쫓아오던 엄마도.. 우린 다 울고 있었다. 내 철없고 이기적인 행동이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내 기억에 아마도 가장 후회스럽고 슬픈 장면이었던 그때- 아마 엄마가 마흔도 채 되지 않은 , 그래. 지금 내 나이보다 한 두 살 더 많았던 그 시기였을 거다.
그렇게 모두한테 잔인한 상처만 남은 내 대학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난 성실한 인간이 못됐고, 머리가 좋지 않았으며, 생활은 궁핍했다. 결국 빚만 남기고 학교를 또 울면서 때려치우고, 내 평생 학교는 없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대학 중퇴자가 무엇을 할 꿈이나 가질 수 있었을까. 먹고사는 게 급급했던 매일. 어디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내가 하물며 이직조차도 학력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세상에서 나는 매일 원망했다. 어떻게 먹고 사는 데에도 졸업장이 필요할까. 대체 그깟 졸업장이 뭐라고.
서른이 넘어서야 방송대로 간신히 학사를 따게 됐다. 여기서도 나는 성실한 학생은 못됐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시는 선배들을 보면서 자책도 하고, F도 받아가며 꾸역꾸역 다니며 졸업장을 받았다. 일반 대학은 아니고, 방송대라는 말에 멸시 아닌 멸시도 받았지만, 노력과 성실의 증거라는 문대통령의 졸업연사에 힘을 받았다.
코스모스로 졸업하고 반년을 놀다가 시작한 대학원 공부. 일반 대학원은 학비가 너무도 무서워서(?) 엄두도 못 내고 방송대에서 그대로 MBA로 진학했다.
(아… 공부는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가.)
작년에 갑상선암에 걸리면서 중간에 멘탈이 부서지며 다 관둘까 했지만, 학우님들과 가족이 응원해 준 덕에 학교를 미루지 않고 졸업식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시작이 쉽지 않을 뿐, 시작하고 난 후엔 어떻게든 마무리짓게 되어있다. 내 시간과 천성이 남들보다 좀 더 느리고 굼뗘서 다른 사람의 몇 배가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남편이 졸업축하 선물로 만년필과 편지를 주었다. 졸업식이 평일이라 참석도 아무것도 생각도 안 했는데 깜짝 축하에 눈물이 뭉클 댔다. 논문을 못쓴 야매 대학원생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며, 경제적 여유가 허락되고 진짜 더 연구하고 공부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땐 꼭 논문도 쓰고 박사도 따리라 마음을 먹었다.
남편에게 받은 편지와 선물을 자랑하니 내가 대학원 졸업하는 것을 몰랐던 엄마가 매우 기뻐해 주었다. 엄마는 엄마가 많이 배우지 못했기에 나라도 늘 많이 공부하길 바란다고 했었다. 어린 시절 두 분이 싸울 때마다 엄마가 아빠를 향해 외마디 비명처럼 외치던 말도 나를 공부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엄마에게 원망했으니,,, 엄마도 그날을 가슴 사무치게 잊지 못하시는 거겠지.
이제 와서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를 해도, 엄마의 마음에 남긴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척 슬프다.
한 사람이 공부하기까진 많은 도움도,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도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새삼 느끼면서 철없는 내 시간을 돌아본다. 스스로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새삼 존경스럽고, 그들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이들에 대한 경외심이 솟구친다.
나는 여태 나를 위해서만 공부해 왔다는 것이 반성되고, 앞으로는 기여와 엄마의 시간을 위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
엄마를 꼭 안고, 무척이나 미안했다고, 그리고 정말 감사하다고, 엄마에게 이 졸업장과 더불어 내 모든 공부해 온 시간들을 바치고 싶다고 말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