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편이 서운한 감정을 흘리듯 털어놨다. 내가 말을 하면 반박부터 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좀체 그렇지, 그럴 수 있지,라고 시작하지 않는단다.
주변에 [아니]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 스스로도 반면 교사하려고 했는데 아직 그걸 내가 못 고쳤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정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남편에겐 본래의 내가 나오는 걸까? 남편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런 습관으로 인해서 사람들하고 관계가 틀어지거나 갈등이 생기지 않냐. 그때 내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진 것을 눈치챘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라는 대화는 마무리 됐다.
남편이 내게 종종 했던 말이다. 반면교사는 핑계고, 그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습관이기에 스스로 고치려고 몇 년간 조심해 왔다. 아직 내가 그러하다면 고쳐야지. 스스로도 그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고, 마음과 언어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남편은 나의 관계를 위해서 애쓰려는 노력들이 보이지 않는 건지, 알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몹시도 서운한 감정이 밀려와서 침묵을 유지하다 애써 웃으며 짧게 잘 자,라고 말하고 안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생각과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아서인지 눕자마자 조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오늘의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니고, 그저 나 자신이 한심해서 우는 것은 꼴사납지 않나. 입술을 꽉 다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 코끝이 시렸던 건 우리 집 외풍이 그날따라 더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말과 말 사이에서 서운한 생각이 들면, 대화를 나눈 상대에게 큰 거리감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선이 크레바스처럼 우리 사이에 깊은 골짜기를 만들고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앞으로 어떤 속상함이 이 관계에서 생겨날지, 불안한 생각들이 크레바스를 통해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다행이게도 관계를 위한 많은 노력들이 조금씩 빛을 발하는데, 전과 달리 우리 사이에 있었던 좋았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그래 우리 사이에 이런 좋은 일들도 있었지, 늘 좋지 않은 일이 생겨난 건 아니었지,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고 그러고 나면 그 순간들이 지금의 서운한 내 마음을 따뜻함으로 안아준다. 우리 사이도 늘 상대적일 것이고, 내 마음도 언제나 불안하고 연약하니 우리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평소에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장면들로 많이 채워둬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자고 일어나니 서운함은 한결 괜찮아졌지만, 마음의 먹먹함을 떨치기가 쉽진 않아서 심리학을 공부하는 분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이참에 확실히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의 내가 충분히 노력하고 있지만, 남편과 나는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가 사건-생각-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과거의 그렇지 못했던 내가 그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구나.
이미 겨울 같았던 내 시간들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겨울 속에서 동상 입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에 흉이 남은 남편의 신념은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나는 정말 겨울 같은 사람일까. 그래,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내가 봄이 아니기에 따뜻한 봄날을 동경하고, 그러하기에 봄 같은 당신 곁에 머무르길 바라니까. 그러니 당신에게서 배운 봄날의 따뜻함을 어설프게나마 내가 최선을 다해 보여주려고 하면, 당신도 나의 아주 미세한 봄날을 눈치 채줄까.
추운 겨울에도 때론 포근한 날이 있는 것처럼. 당신도 나의 겨울에 숨겨진 따스함을 알아채고, 내가 누구보다 따스한 봄날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는 걸, 당신이 아주 조금은 알아채 줄 수 있을까..
나의 관계는 언제쯤 완연한 봄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