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후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 든다면

모성 신화와 이름의 회복

by 올리비아 킴


나는 점점 그림자에 잠식되는 것 같아.

임신한 몸은 점점 무겁고 느려진다. 하지만 더 무거운 건 몸이 아니다. 그건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다.

이 문장은 절망이 아니다. 이것은 인식이다. 그림자를 본 자만이, 빛의 방향을 안다.

내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는 아직 거기 있다. 내가 “나의” 욕망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욕망은 아직 살아 있다.


엄마가 되는 순간, 나는 기능이 된다.



문명은 여성의 몸을 신화로 만든다. 그 신화의 이름은 ‘모성’이다.

임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세상은 나를 다르게 부르기 시작했다. “ㅇㅇ이 엄마.” 아직 아이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미 ‘엄마’로 호명된다. 그 순간, 나는 개인이기를 멈춘다. 나는 기능이 된다. 제도적 장치가 된다. 생명의 매개체로 재편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엄마가 되면 달라져.” “모성애는 본능이야.”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이 말들은 친절하게 들린다. 축복처럼 들린다.

하지만 미묘한 불쾌감은 무엇일까?

아, 이것은 명령이구나. 나는 달라져야 한다.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야 한다.


언어는 통제의 수단이다.

사람을 호명하는 순간, 그 사람은 언어의 질서 속에 포섭된다. “엄마”라는 말은 누군가의 딸이자 연인이자 친구였던 한 인간을 하나의 제도로 변환시킨다.

나의 욕망은 삭제된다.

“엄마가 그런 걸 하고 싶어?”

나의 시간은 타인의 필요에 따라 분절된다.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는 이제 사랑의 상징으로서만 말해진다.


엄마가 되기에 분노는 부적절하다. 허무는 부적절하다. 불안은 부적절하다. 욕망은—더더욱 부적절하다.

이것이 문명의 폭력이다. 조용하고, 정당하며, 찬양으로 위장된.


우리는 평생 다양한 호칭 속을 떠돈다.

딸. 학생. 여자친구. 아내. 며느리. 엄마. 할머니. 우리는 태어날 때 받은 이름으로 불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호칭은 관계를 규정한다. 관계는 역할을 요구한다. 역할은 욕망을 지운다. 우리는 그 호칭들에 의존하고, 길들여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세뇌당한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점점 “나는 누구의 무엇인가?“로 대체된다.



모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은밀하다. 그것은 폭력을 사랑의 언어로 번역한다. 희생을 숭고함으로 포장한다.

여자는 태어날 때 이름을 받는다. 하지만 그 이름은 평생 유예된다.

임신한 순간부터,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OO 엄마”가 된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의 부속품이 된다.

그리고 만약 이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한다면,만약 희생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여성으로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넌 엄마 자격이 없어.”“이기적이야.”

이것이 시대가 여성에게 부여한 윤리다.

희생하라.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라. 너의 이름은 잊어라. 너는 이제 역할이다. 그리고 네 욕망은 포기하라.


라캉은 말했다.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

이것은 이기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주체로 존재하라는 뜻이다.

라캉이 말했듯, 우리는 상징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징계는 중립적이지 않다. 호명은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주체를 가둔다.


욕망은 결핍에서 온다. 그리고 그 결핍이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든다. “엄마”라는 역할이 모든 결핍을 메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나는 완결된 이미지가 된다.

하지만 진짜 나는 그 틈새에 있다.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는 공간에, 여전히 무언가를 원하는 그 감각에.

욕망은 이기심이 아니다. 욕망은 존재의 증거다.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 그것이 나를 ‘엄마’라는 완결된 이미지가 아닌, 여전히 살아 있고 변화하는 주체로 만든다.


나는 엄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만’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음악을 듣고 싶고, 책을 읽고 싶고, 친구를 만나고 싶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나는 여전히 화를 낼 수 있고, 슬플 수 있고, 불안할 수 있고, 욕망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증거다. 이것은 주체의 증거다.


나는 이름으로서,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냥 내 이름이고 싶어.”

그 말은 반항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회복이다.

모성은 신화에서 선택으로 전환된다. 역할은 관계로 전환된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내 이름으로 존재할 때, 내가 내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나는 더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역할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체로서 사랑할 수 있다.

내가 나의 이름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내가 나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문명의 문법은 균열을 일으킨다.

문명은 여전히 여성을 ‘엄마’로 호명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단어는 틈을 품고 있다. 나의 이름이, 나의 욕망이, 그 틈새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신한 당신에게


당신이 불안하다면, 그건 당신이 나쁜 엄마여서가 아니다.

당신이 화가 난다면, 그건 당신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당신이 혼자 있고 싶다면, 그건 당신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여전히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건 당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부디 욕망을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은 엄마이기 전에 인간이다. 당신은 역할이기 전에 이름이다. 당신은 이미지이기 전에 주체다.


나는 더 이상 역할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이름으로서, 욕망하는 주체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