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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Apr 17. 2018

우리가 지난날보다 지금이 행복한 이유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 남겨진 시즈카 고젠의 노래, 그리고 우리의 바람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싶어 온 가마쿠라인데 예상보다 한 주 일찍 피어버린 꽃은 이제 몇 송이 남지 않았다. 가녀린 꽃잎을 붙들고 있던 꽃받침은 제 소임을 다한 것처럼 속 시원한 얼굴로 붉은 꽃줄기를 내밀고 있었다. 하늘은 금세라도 울컥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얼굴이다.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친구가 비를 맞을까 걱정이 앞서긴 했지만, 여러 상점가가 즐비해 있으니 괜찮은 우산을 기념으로 사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로 가자."



 숙소에 짐을 맡긴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마쿠라 역에서 내렸다. 역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붉은 도리이(鳥居)가 서 있다. 신의 영역과 일반 세계의 경계를 나눈 도리이, 그곳에 발을 내딛으면 신사로 향하는 코마치도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찬다. 가마쿠라의 코마치도리는 에도시대부터 서민 상점가로 그 명맥이 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작은 수제 물품을 파는 곳부터 기념품과 다양한 간식거리가 즐비해 있어, 가마쿠라의 상징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궁을 찾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기내식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기에 우리는 매우 허기져 있었다. 여러 간식거리 중 멸치 치어, 이 곳 말로는 시라스가 들어간 계란말이가 눈에 띄었다. 사이좋게 하나씩 들어 입에 집어넣으니 달고 짠 계란말이의 폭신폭신한 식감이 느껴진다. 동시에 이곳의 특산품인 시라스(멸치 치어)가 씹히는 맛이 즐겁기까지 하다. 나는 계란 요리 중 특히나 계란말이를 좋아하는데, 자주 해 먹는 편은 아니다. 자취 15년 차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요리에 서툴기도 하지만, 나에게 계란말이가 특별한 이유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늘 혼자 먹다, 함께 먹으니 더욱 맛있는 코마치도리의 시라스 계란말이

 

 아빠는 나만큼 계란 요리를 좋아하셔서 엄마는 자주 밥상에 계란말이를 올려놓으시곤 했다. 해가 질 무렵,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집으로 뛰어들어가면 대문 밖에서부터 엄마의 요리 냄새가 날 기분 좋게 만들었다. 통통통 거리는 도마 소리는 경쾌하고 리드미컬했으며, 달궈진 팬에 지글거리며 김을 내는 계란지단은 고소한 향을 내뿜었다. 난 서둘러 손을 씻고 엄마를 도왔다. 가족 순서대로 수저를 놓으며 엄마의 수고를 더는 착한 딸이고 싶었다. 엄마가 만든 계란말이는 파, 맛살, 김이 들어가 늘 도톰했고 간이 잘 되어 있었다. 가족이 좁은 밥상에 둘러앉아 뜨거운 계란말이를 한 입 호호 불어 먹을 때, 어린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족의 마지막 웃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우리도 결국 IMF의 직격탄을 피해갈 수 없는 서민이었고, 일자리를 잃은 아빠는 이리저리 전전 긍긍했지만, 그 상황에 너무도 지쳤던 모양인지 실의에 빠졌다. 내 나이였던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어떻게 해서든 먹여 살리기 위해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었지만, 불어만가는 아빠의 빚으로 엄마 또한 지쳐버렸다. 결국 아직 학교도 채 입학하지 못한 막내동생과, 청소년이었던 나와 여동생은 부모님이 견디지 못한 생활을 그대로 떠안아야만 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우리 가족은 허공에서 유리컵이 떨어지듯 산산조각 났다. 제각각 가슴에 날카로운 파편을 가슴에 묻은 채 서로에게 상처를 줬고, 그 고통이 너무도 커서 이어 붙이려는 생각조차 하지도 못했다. 하나였던 가족이 단 하루아침에 그 모습을 잃고 찢어지자, 나는 큰 고통과 상실감에 빠졌고 쉽사리 털고 일어나지를 못했다. 부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았고, 어린 동생들을 감당하지 못한 채 나는 문제아라는 타이틀과 함께 선생님들이 포기할 정도로 많은 방황을 했고,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친구들마저 나를 하나 둘 떠나갔다.   

 

 은정이도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다섯 살부터 다툼 한 번 없이 우애 깊은 자매처럼 자라온 친구이기에 떠나갈까 봐, 그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더욱 두려웠고, 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은정이 집에 놀러 갈 때면 완벽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과거 우리 가족의 모습을 떠올린 채 잠이 들 때면 내 처지를 숨죽여 흐느끼곤 했다.


쪼르르, 딱 달라 붙은 당고 마냥 나와 은정이의 우정도 끈끈하게 이어져 온 것 같다


 우리가 정말 친한 친구였기 때문일까. 어떤 운명이 작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은정이의 삶도 그렇게 평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몰랐던 은정이 가족의 이야기. 서로의 아픔을 털어놓게 된 열다섯, 우리는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내 처지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된 사실이 너무도 불쌍했다. 동시에 친한 사이라고 말하면서도 서로가 간직한 아픔을 몰랐던 것이 미안했다. 서로에게서 등 돌리기보다 오히려 함께 위로하고 아껴주면서 더욱 끈끈해졌다. 정말 신이 있다면 그래도 우리가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지 않도록 위로해주기 위해 서로를 만나게 해 준 것일까.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대로를 따라 저 멀리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 최초의 막부 정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80년 교토에 있던 신사를 가마쿠라로 옮겨오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막부 시설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하치만이라는 무신을 모셔 많은 무사들이 승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쇠퇴한 후 건물의 일부가 불타기도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에도 시대에는 관음당이나 법화당 같은 불교 이름이 붙은 건물들도 지어졌다. 하지만 1800년대에 다시 에도 막부가 무너지면서 건물과 일부 문화재들이 소실되었고, 남아있는 것들을 도쿄 국립 박물관이나, 가마쿠라의 주후쿠 사, 센소 사, 후몬인 등의 절에 보관되어 있다. 과거 쇼군들의 화려한 무대가 되었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도 이제 옛 흔적만을 간신히 갖춘 채 그때와는 전혀 다른 역할로 가마쿠라를 상징하고만 있는 것 같다.


 61개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붉은색으로 칠해진 혼구와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오미쿠지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일본은 중요한 일에 제비뽑기로 신의 뜻을 물었던 것이 '오미쿠지'의 기원이라고 한다. 최근처럼 개인의 길흉을 신에게 묻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가 처음이라고 하니 그 기원이 된 곳에 온 감회가 새롭다. 본당에 들어가자 은정이가 기도를 한다. 아이를 위한 기도인지, 아니면 앞으로의 평안을 바라는 기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나도 힘든 시절에는 종교에 많이 의지했었다.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가슴 깊은 곳에 종교는 큰 덩어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모태 신앙이 불교인 데다 어머니가 워낙 독실하게 믿으셨던 영향이 컸다. 나도 중학교까지는 불교 캠프를 가고, 108배, 1800배를 하며 경전을 달달 외우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반항 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덧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성경에 깊이 심취했다. 그러나 애당초 나와 종교는 물과 기름이었던 모양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곧이 곧대로 믿는 게 힘들었고, 매 주일마다 내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 두 번째로 힘들었다. 특히나 교회 설교에서 목사님의 설교 반 이상이 헌금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자 나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이사와 동시에 교회를 박차고 나왔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닐까. 신이 어떤 힘을 발휘해서 내 삶을 지금보다 더 나아지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서 생성된 유기체로 혼합된 생명체일 뿐 아닌가?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 순수한 종교 그 자체의 역할인 게 맞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옛 성인들은 모두를 현재의 괴로움에서 구하기 위해 각자가 가지고 있던 사상을 전파했고, 그것을 토대로 많은 이들이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종교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종교라는 역할을 해 왔을까. 정치에 휘둘려 그 본연의 색채를 잃고 수많은 시대를 흘러오지 않았을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종교'는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일까, 숭고한 종교란 그럼 대체 어떤 것일까?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우리는 종교를 어떤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할까.

 불교도, 기독교도, 천주교도였던 나는 아직 그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단지, 흩어지는 벚꽃처럼 연약한 우리네 인간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종교는 그들의 마음이 위안이 된 채 모두를 이 세대까지 이끌고 온 것은 아닐까. 하다못해, 이렇게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누군가를 위하고 좋은 것만을 바라고 있을 테니까.


 기도하는 은정이를 바라보며, 은정이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졌으면 했다. 그녀가 더 이상 힘든 일이 없게, 이제는 좀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 꼭 잘되자, 우린 잘 될 거야."


 은정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라도 하듯 은정이는 이전의 어려움을 청산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어디까지나 비교가 전제되긴 했지만, 그녀가 결혼 전 겪었던 파혼, 그리고 현실의 벽에 좌절하며 혼자 그 슬픔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발악하던 모습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많은 친구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봤지만, 결혼하는 순간 눈물이 난 건 은정이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여태 겪던 괴로움이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제 이 친구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감사했던 건, '나는 꼭 잘 될 거야, 나는 잘 된다'가 아닌 '우리'라는 말을 붙여주었기 때문이다. 혼자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 함께 행복해지길 바라는 친구의 선한 소망이 아직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도 큰 힘을 발휘한 걸까.



 나도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이제야 내가 타고 있는 배가 조금 물길을 잡아가는 기분이 든다.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 감정의 기복을 이겨내지 못해 모든 관계에 내 심장에 박힌 유리 파편을 던져 내면서 살아왔다. 다행이게도 27살 무렵, 인생의 스승이라 부를만한 분들을 몇 분 만났다. 퀀텀 석세스의 이하나 강사님, 열린 비즈랩 안병민 대표님, 연극 연출이셨던 현종우 선배님,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최수희 실장님.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주었고, 배움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고, 지식의 등불이 되어주셨으며, 혼자가 아닌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세상인 걸 깨닫게 해주셨다. 물론 그분들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실 테고, 어쩌면 내가 누군지도 모르실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실감에 젖어있던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주셨고, 그 덕에 만학도의 길을 걷고, 히말라야 트레킹도 다녀오면서 멋진 서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만년 꼴찌, 문제아였던 직장에서도─다른 면에서는 아직도 문제아지만─ 이젠 내 브랜드를 잡고 착실히 하루하루 채워나가고 있다.


마이덴(舞殿)  하배전(下拝殿)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연인 시즈카 고젠도 그리움에 사무친 여인이었다.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미움받아 쫓기던 요시츠네와 헤어져 가마쿠라로 압송된 당대 최고의 무희 시즈카 고젠은 마이덴에서 요시츠네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렀다.


요시노 산봉우리 흰 눈을 헤치고 들어가신 그대 발자취를 따르고 싶어라.
시즈여 시즈 하시던 그때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적장인 요리토모의 앞에서 요시츠네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시즈카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요리토모는 격노했지만, 그의 정실인 호조 마사코가 말렸다. 그녀는 요리토모가 유배를 가던 시절 그와의 힘든 만남을 가지던 때와 거병 당시의 불안한 날들을 알고 있었기에 시즈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호조 마사코의 기지로 목숨을 구한 시즈카 고젠이었지만, 그녀의 뱃속에 있던 요시츠네의 아이는 출산 후 사내아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지 못한 채 강제로 아이까지 잃은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을까. 내가 가족의 모습을 그리워하듯 시즈카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리고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녀는 과거를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것이다. 시즈카 고젠의 노래가 여전히 내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건, 나 또한 그녀처럼 지난 시간이 사무칠 만큼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온 가족이 밥상을 두고 계란말이를 먹으며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모습. 그 모습을 떠올리면 어느덧 내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거린다.

 



 갑자기 은정이가 묻는다.

 "만약에 예전으로 돌아가라면 넌 어때?"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 나는 고개를 젓는다. 미소가 편안하게 자리 잡은 은정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인다. 지금이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겠지.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금이 훨씬 좋아.

  내 말에 은정이가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나도 그래."


 어느덧 우리는 함께 하며 과거의 상실감과 상처를 조금씩 마주하며 살아갈 힘이 생겼다. 과거는 그립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긴 채 과거를 뛰어넘을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여행정보

쓰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

2 Chome-1-31 Yukinoshita, Kamakura, Kanagawa

오픈 시간

4월 - 9월

5am – 8:30pm (gate closes at 9pm)

10월 - 3월

6am – 8:30pm (gate closes at 9pm)

1월 - 3월

Open 24 hours

입장료 없음



캬라웨이 카레(キャラウェイ)

2 Chome-12-20, Komachi, Kamakura-shi, Kanagawa

오픈 시간

11:00~20:00 (L.O.19:30) 월요일 휴무

730~830¥(밥 小기준)

비프와 치즈 메뉴가 인기(포장가능)

1948년 오픈한 가마쿠라 명물 카레

카드 사용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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