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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킴 May 13. 2018

지금, 여기서 산다는 것

고토쿠인, 가마쿠라 여행 이틀째 - 하나

 아침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무 창틀에 창호로 덧들어진 창문이 덜커덕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한 방을 사용한 룩셈부르크 소녀 셋은 새벽 일찍부터 짐을 싸고 떠난 모양인지 이불은 곱게 개어져 있고, 방 안에는 나와 은정이 둘 뿐이었다. 은정이는 피곤했는지 아직 깊게 잠들어 있었다. 하긴 홀 몸도 아닌데 전날 하루 종일 이동에 시간을 쏟아부었으니 배로 피곤했을 거다. 은정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좀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 곳에서만 맞이할 수 있는 아침을 그냥 보내기가 아쉽다.



 느린 걸음으로 2층 테라스로 나갔다. 날씨는 맑고, 바람은 거세게 분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소녀가 교복을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직장인도 보인다. 평일 아침 일상을 관망하듯이 지켜보며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여행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나도 누군가가 지켜보는 일상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오늘 금요일의 시작은 낯설다. 타국의 습한 공기, 뺨에 닿는 조금 센 바람, 맨발에 닿는 나무 바닥의 낯선 느낌, 그리고 제약 없는 자유가 시작되는 것만 같다.



 가볍게 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여행자들을 다음 여행지로 떠나보낸 게스트 하우스에는 친구와 나 뿐이다. 친구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툇마루에 앉아 전날 슈퍼에서 산 요거트를 먹으며 빈둥거렸다. 참으로 값진 여유다.

 그러고보니 출발 전날까지도 야근을 했었다. 일을 잘 분배하지 못하는 성격탓에 혼자 다 끌어안다보니 일이 배로 늘어났다. 캐리어에 짐은 그냥 대충 필요한 것들을 아무렇게나 집어 넣었고, 몇시간 잠들지 못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공항으로 왔다. 지금의 여유가 환상인건지, 어제까지의 정신없던 날들이 환상인건지, 게스트하우스의 툇마루에 드러누워 있으니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남들에 비해 늘 뒤쳐졌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나에게 이렇게 뒹굴거리는 시간은 늘상 죄책감을 안겨 줬기에 주말에도 드러눕기는 커녕 시종일관 바쁜 사람처럼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됐었다. 다들 공부할 시기에, 직장을 다니고 돈을 모아야할 시기에 그저 시간이나 탕진하며 우울감에 젖어 있던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라 잡으려해도, 이미 너무 많이 멀어져버린 거리, 가속도가 붙은 그들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나도 뛰고 있는데, 모두는 더 멀리 나가는 끝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숨막히는 레이스.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잊어버렸던 날 멈추게 한 것이 가마쿠라다.  처음으로 느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착각. 나를 숨막히게 만들었던 '비교'와 '강박'에서 벗어난 황홀함. 설령 그것이 환상과 착각이라고 해도 좋았을 만큼 가슴으로 젖어오는 기분. 길을 잃어버리고 비를 맞고 서 있었던 와다즈카역에서 난 오히려 행복했다. 어깨에 쏟아지는 빗줄기에게선 이제 그만 스스로를 몰아세우라고 다독거리던 상냥함이 느껴졌다. 비록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그 여유를 잃었지만, 삶이 숨막히다고 느낄 때마다 이곳에 도착하면 다시 나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친구가 준비를 마치고 내려왔다. 게스트하우스의 스탭의 '다녀오세요'라는 다정한 인사와 함께 우리는 문을 나섰다.

 오늘은 가마쿠라 대불, 하세데라를 갔다가 에노덴을 타고 에노시마를 거쳐 다시 이나무라가사키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날씨가 맑고, 바람은 상쾌했다. 버스를 타는 대신 가마쿠라 대불까지 산책하는 기분으로 30여분을 걸었다.

 걸어가는 내내 정감 넘치는 따뜻한 가옥들과 거리가 우리를 반겨준다. 높지 않은 건물들 뒤로 하늘이 보이고 자동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거리는 깨끗하고 집집마다 작은 정원들이 보여 보는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카지와라구치에서 가마쿠라 대불까지는 터널을 하나 통과해야 한다. 자동차로는 수없이 많이 통과하지만, 도보로는 터널을 지날 일이 거의 없기에 입구에 들어서기 전 나는 긴장된 마음을 누르기 위해 크게 심호흡했다. 누군가 터널을 걸어나오기에 용기를 내고 한 발 내딛었다. 길지 않은 터널이었지만 나와 은정이는 저 멀리 빛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어렸을 때는 터널도 놀이터였다. 어두웠지만 여러 친구들끼리 아우성을 치며 괴기 체험이라도 한 마냥 무사히 통과한 그네들을 위해 박수를 치곤 했었다. 친구들과 까르르 웃으며 지나던 놀이터 같은 곳이 어른이 되어선 또다른 두려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가 정말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어렸을 때 매일 손으로 잡고 놀던 벌이며, 여치, 잠자리도 지금은 손 끝 하나 대지 못한다. 어렸을 때는 대상이 가지는 아름다움 자체를 느끼고 바라봤다면, 어른이 되면 대상이 가져다 줄 두려움 면을 먼저 보게 되나보다. 터널도 어느새 그런 존재가 되버린 것은 아닐까.


 터널을 빠져 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토쿠인의 입구에 도착한다. 절이라고 하기엔 생각보다 크지 않은 이 곳은 가마쿠라를 상징하는 가마쿠라 대불이 더욱 유명하다. 각 계절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갈아 입는 이곳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있다. 좁은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곧 탁 트인 경내가 보이고, 그 한 가운데 가마쿠라 대불이 정좌한 채 평온한 얼굴로 맞아준다.


 가마쿠라 막부 시절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목조 불상은 이후 청동으로 다시 재건축 되었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몸은 약간 구부정하게 굽어 있는 것이 특징인 대불은 무려 850년이 훨씬 넘은 문화 유산이다. 대불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사진을 찍을 엄두는 채 나지 않고, 가마쿠라 대불은 머리가 무거워 목디스크 일꺼라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우리는 천천히 경내를 걸었다.


 가마쿠라를 이 시기에 온 것은 순전히 벚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제 대략 짐작했듯이 벚꽃은 거의 떨어지고, 꽃을 받치고 있던 꽃받침이 연녹색 잎 속에 숨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마쿠라에 오기 전 부산은 한창 벚꽃이 풍성하게 피어날 시기였다. 바람이 한번 일렁이면 꽃이 숨막힐 정도로 불어와 내가 꽃 속에 있는 것같은 황홀감마저 들었다. 걸어가는 모든 사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걸었다. 그런 느낌을 이 곳에서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는데 벚꽃은 화려하게 피었던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매년 3월이 되면 꽃이 피기만을 기다린다. 화려하고 은은한 색을 내 두 눈과 가슴에 가득 담기를 바라며 그렇게 한달이 지난 후 꽃은 소리 없이 갑자기 피어난다. 하지만 기다렸던 내 바람과는 별개로 꽃과 함께 일도 풍성하게 피어났다. 꽃피는 시절이면 늘어나는 일거리에 평일이며 주말이며 출장을 한창 다니던 시기에는 꽃을 볼 여유도 기회도 없어 늘 안달하곤 한다. 간신히 시간을 내서 꽃을 보기 위해  가마쿠라를 찾았지만, 번번히 꽃을 볼 기회를 놓쳤다. 그것이 아쉬워 다시 찾은 지금, 나는 또 벚꽃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을 채 숨기지 못한 채 나와 은정이는 경내를 한바퀴 돌았다. 아! 저 멀리 가느다랗게 뻗은 가지 위로 느즈막히 피어난 겹벚꽃이 보인다. 우리는 화색을 띄며 겹벚꽃 앞으로 달려갔다. 풍성하지도, 흩날리지도 않은 듬성듬성 심어둔 겹벚꽃이다.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계속 사진을 찍어댔다. 순간 나는 셔터를 누르다 피식 웃고 말았다. '꽃이면 뭐든 좋을 텐데’라고 해놓고선 눈 앞에 피어 있는 꽃을 보고 ‘벚꽃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을 무심결에 내뱉았기 때문이다.

 아, 순간 함께 출장을 다녔던 선배의 충고가 떠오른다.


 "넌 그때보다는 내 일상이 생겼고 얻은 것이 많은데 왜 자꾸 잃는 것만 생각하니. 꽃이 피는지 지는지조차 모른채 정신없이 출장다니던 시절이 있었잖아. 과거라서 단점을 망각했고 좋은 것만 기억해서 과거에 메이면 후회가 많고, 미래에 꽂히면 걱정이 많아져.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 다 있으니 배부른 소리하는 게 아니겠니. 넌 항상 말하지만, 미래에 뒤쳐질까하는 걱정 때문에 지금 너무 힘들고 현재에 만족하는 거에 인색해. 지금 충분한데."

 

 내 목에 걸린 ‘LIVE NOW’, 좌우명이 무색해진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꽃을 눈 앞에 두고, 그토록 떠나고 싶다던 여행을 떠나와서 나는 또 어떤 과거를 끄집어내면서 '비교'하고 있는걸까.

 현재를 살자고 되뇌이며, 몸에서 결코 떨어트려 놓지 않으면서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 반면에 은정이는 겹벚꽃을 보면서도 화색이 가시질 않는다.  

 아직 벚꽃이 채 지지 않았다며, 우리가 발견한 겹벚꽃 앞에서 눈을 떼질 못한다. 은정이는 '현재'를 충분히 느끼고,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보고, 선배의 충고를 가슴에 되뇌인 채 이제는 어떤 꽃을 보든 아니, 꽃을 보지 못해도 모든 것에 감사하겠다는 마음으로 고토쿠인을 떠났다.




고토쿠인 <가마쿠라대불>
하세역에서 도보로 가능
4 Chome-2-28 Hase Kamakura
입장료 : 200엔
시간 : 오전8시~5시30분(동절기에는 5시)
가마쿠라 대불 뒤에는 우리나라 유산인 [관월당]이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내에 있었던 이 건물은 일제시대 담보로 이용되며 한 증권회사로 넘어가고 지금 저 곳에 이저뇌어 있다. 현재 국내로 이전하려는 협의가 진행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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