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오늘 밤 잠 못 이루고
"나는 지금 생각보다 훨씬 가깝고 설레는 위치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고 너 또한 그와 같은 위치에 있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여름을 나기 위한 긴 여행을 기획했다.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착실히 준비했고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열차가 일정한 리듬으로 울렁거렸고 그에 맞춰 나는 심호흡을 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야.'
나는 더 이상 외로움이란 섬에서 탈출을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나 같은 다다이즘의 거장도 사랑하는 연인을 멀리 두고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어쨌든 그녀가 오른 비행기는 9시 도착이었고 나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제2터미널에 8시에 도착했다. 벤치 뒤쪽으로 난 통 유리창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들어오던 햇볕이 기억난다.
나는 언제나 [길 위에서]의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가 샌프란시스코발 뉴욕행 버스에 오르기 전, 기나긴 여정을 버티기 위해 잼을 바른 샌드위치를 만드는 장면을 좋아했다. 그걸 나눠달라고 하는 딘과 메릴루의 부탁을 기분 나빠하는 장면이 단연 최고다.
나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제1터미널에서 삼박 사 일간 노숙을 한 일이 있다. 언제나 시끌벅적할 것 같지만 밤이 되면 공항은 고요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사실 공항은 굉장히 지내기 편한데, 화장실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온수도 잘 나온다) 침대 겸 소파 용도의 벤치도 구석구석 많고, 마실 물도 주고, 난방이나 냉방도 틀어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남아도는 낮에 한 시간 가량 밖으로 나가 마트에서 핫도그 빵(12개들이)과 살라미 소시지를 샀다. 그걸로 12개의 살라미 핫도그를 만들어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먹었다. 배가 고프다고 여러 개를 먹어버리면 밤에 낭패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공항의 잡화점들은 문을 닫고, 유난히 값비싸고 양이 적은 식당들이 행패를 부린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청소부들이 주로 점심을 해결하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빵 속에 살라미 햄을 넣고 있으면, 항상 [길 위에서]의 장면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우리가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결국 이야기 속 주인공과 깊은 유대를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동일시'라는 그럴듯한 단어가 있다. 샐은 그 상황에 대해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나는 그보다 훨씬 젊었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는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초록색 코오롱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그녀는 유럽 땅을 밟기 위해 겨우내 동안 개미처럼 착실히 준비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심연 같다. 목덜미만 살짝 가리는 짧은 머리, 어두운 명도의 머리색이 어색하지만 아직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
혹자들은 프랑크푸르트가 굉장히 심심하고 볼 게 없는 도시라 말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렇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마인강은 확실히 세느 강에 비해 밋밋하고 뢰머 광장은 산타루치아 광장 같은 곳과 비교하면 아기자기한 애들 장난 같다. 프랑크푸르트 쇼핑의 천국이라는 자일 거리는 사당역의 골목만도 못하다. 유럽의 경제 수도 중 한 곳이라고 고층 빌딩 숲을 자랑하곤 하는데, 서울에서 온 나는 사실 이곳을 미니어처 레고 마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어딘가와 비교하면 프랑크푸르트는 한없이 평범해지고 신비함은 옅어지며, 마음은 더 어둡고 단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보통 이 도시는 단순히 유럽 내륙 여행의 관문 도시로 많이 인식된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이 한 교실 안의 학생들이라면 프랑크푸르트는 거기 있는지 눈에 잘 안 띄는 우수하지만 평범한 학생이다. 싹싹하고 맡은 바 임무나 자기 공부도 잘하는데 왠지 재미가 없다.
파리라는 학생은 수려한 외모에 언변이 뛰어나고 사람을 휘어잡는 재주가 있다. 런던은 딱딱하고 재수 없지만 카리스마가 있어 존재감이 있다. 로마는 미치광이. 하지만 프랑크푸르트는 그냥 반에서 8~9등 정도 하는 건실한 주번 같은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 프랑크푸르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 건실함 앞에서 덜덜 떨리지만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게 되고 조금씩 그 진솔함 속에 빠져들게 되는데…….
처음 그녀와 마인 강변을 걸을 때였다. 나는 그녀에게 뢰머 광장 근방의 괴테의 생가와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 봄의 온도를 머금은 마인 강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빠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써서 보내줬던 기다란 엽서 있잖아.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던 게 뇌리에 남았어.
[여기선 모두들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매일매일. 아침 9시부터 6시까지도 말이야. 마인 강변을 걷다 보면 나도 그런 프랑크푸르트의 일상을 보내는 한 사람이 된 것 같아 행복해.]라고."
"그 엽서를 읽으면서 나도 그런 일상 속에 들어가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했어. 학교에서 강의 들을 때도, 스타벅스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도 여기가 궁금했어. 마인 강변의 일상은 어떨까. 오빠가 보내고 있는 일상은 어떨까. 행복한 일상이란 건 어떤 걸까."
"사실 오빠가 말한 일상의 느낌이 어떤 건지 잘 몰랐는데, 여기 마인 강변을 걸으니까 무슨 느낌인지 느껴져. 풀 냄새가 나고, 오래된 냄새가 나고, 평화로운 냄새가 나. 마음이 편해져."
신성로마제국의 전성기. 오토 대제는 프랑크푸르트가 있는 작센 지방의 공작에서 출발했다. 그는 독일 지역을 규합하고 프랑스 일부와 이탈리아까지 정복한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인 강변을 걸으며 호밀빵을 뜯어먹고 사과주를 마시며 잔디밭에 드러누워 일상을 보냈다(을 것이다).
그리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여행에 과도한 기대를 거는 것 같다. 다른 나라,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어디 꿈나라로 떠나는 것처럼 여긴다. 가진 모든 근심과 걱정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걸 가능케 하는 건 여행이 아니라 죽음이다. 여행은 그저 여기가 아닌 새로운 장소에서 보내는 또 다른 일상이다. 다만 반복되지 않을 뿐. 다만 그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산뜻함으로 충분히 기분 좋을 뿐.
하릴없이 앉아 풀떼기를 뜯으며 시간을 보내는데도 행복이 엄습했다. 사실 행복은 특별함보다는 평범함과 훨씬 더 친하다. 사실 행복은 여행보다는 일상과 훨씬 더 가깝다. 행복이란 것에 대해 정말 깊게 생각해보면, 그건 어디 멀리 있지 않다. 행복은 식탁 위에, 침대 곁에 있다.
그녀 말대로 우리는 일과를 마치고 저녁 마실을 나온 프랑크푸르터가 되었다. 선선한 초여름, 독일의 오래된 호밀빵과 프랑크푸르터(소시지) 냄새를 맡으며, 푸른 녹음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고층 빌딩 숲을 멀리 바라본다. 우리의 손에는 마인 강변에서 벌어진 어느 알 수 없는 행사장의 공짜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높은 마인 타워에 서서히 불이 들어올 것 같다. 한 발자국 떨어져 도시를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녀의 다리를 베고 몸을 쭉 뻗어 누워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이 지난 것만 같다. 평온한 일상. 손을 뻗으면 말캉한 행복의 감촉이 느껴지는 평범한 저녁. 말랑한 기분이 들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 가는 느낌을 받는다. 일상 속에서 가끔 그런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