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이 3년 넘게 딸아이의 등하원을 담당해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 톡방에선 어머님이 아이의 하루 일상과 기분, 사진 등을 공유해 주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톡방에 장모님이 카톡을 하셨다.
회의를 하던 나는 카톡을 확인한 순간부터 정신을 잃었으나 육신만은 사회적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로 굳었다. 내가 그래도 사회생활 10년 찬데 혼절할 수는 없지.
하지만 뒤이어 날아온 카톡에 나는 쓰러져 버렸다.
어피치는 눈치 없이 왜 신난걸까.
우리 부부가 구축한 육아 환경은 어쩔 때는 튼튼한 돌로만 쌓은 성벽과 같이 공고해 보여서 이젠 됐다고 안도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 성의 안쪽 어딘가는 모래더미로 보수하고 나뭇가지로 막아 땜질해놨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우리의 육아는, 어머님의 말 한마디에도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 같다.
어머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회의는 끝났다. 몇 마디를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와이프는 장모님에게, 엄마가 고생이 많다. 나도 안다. 2년 뒤에는 내가 육아 휴직을 내겠다. 등등 읍소를 하고 있었다. 읍소가 맞는 표현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하소연함' 이란다. 와이프는 실제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읍소를 했다는 건 정확한 표현이 맞다.
사람을 구하면 얼마지, 어디서 구하나, 애를 때리기도 한다던데,
그럼 와이프가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수입이 줄겠구나, 그래도 애한테는 그게 제일 좋겠지, 월급 받으면서 사람 쓰느라 돈 나가면 차라리 관두는 게 낫지,
그럼 수입이 줄잖아, 그럼 사람을 구해야 하나, 애를 꼬집는다던데,
그럼 와이프가 관둬야겠네, 그럼 내가 외벌이가 되는구나
의 무한반복 대혼돈의 육아 멀티버스 무한루프. 차라리 도르마무가 애를 키워줄 수는 없나. 누구보다 강한 아이로 크긴 하겠다. 아니 이왕이면 이상한 놈 취급은 받아도 닥터가 되는 게 좋겠지. 혼자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나도 장모님께 읍소를 했다. 즈으은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아뢰오는 심정으로.
어머님 너무 힘드실 때는 이렇게 저희한테 꼭 얘기해 주세요. 제가 연차 내도 되고요. 어머님 꼭 쉬실 수 있게 할게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당연하게 느껴 온 장모님의 희생과 고됨이 갑자기 느껴졌다.
당연한 희생은 없다. 당연한 황혼육아도 없다. 그런데 그 희생을 익숙하게 받는 사람들은 그걸 정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만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우리 부부 얘기다.
다람이는 코로나로 많이 아팠다. 아이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훈육을 뒤로 미뤘다. 그러다 보니 아기 짓이 심해졌고, 떼가 늘었다. 코로나로 3주 넘게 어린이집을 가지 않았던 다람이는 아마 월요일이라 더욱 심하게 등원을 거부했던 것 같다. 마음 약해서 손녀한테 야단도 치지 못하시는 장모님의 월요일은 아마 평소보다 더 힘드셨을 거다. 다람아 눈치 챙겨... 제발
얼른 퇴근해서 장모님을 퇴근시켜 드려야 마땅한 날이었는데, 회사가 내 사정을 봐줄 리는 없는지라 야근을 했다. 회사는 그런 거다. 애는 너 혼자만 키우냐? 나 때는 애 셋도 다 키웠어~ 라고 반박하는 게 회사니까.
어머님, 오늘 힘드셨을텐데 제가 얼른 가서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죄송해요. 야근이라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다람이 엄마랑 얘기해보고 방법을 좀 찾아볼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
하고 톡을 보냈더니 사위가 마음에 쓰이셨는지 바로 답장을 보내셨다.
장모님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아 다행이다. 앞으로의 여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모두의 마음과 몸이 최대한 다치지 않는 선에서 방안을 짜내봐야겠다.
연봉 인상도 말씀드려봐야겠다. 장모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진심으로요.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관심과 댓글을 받게 되었습니다.
글을 삭제할까 고민하다가, 아니면 저희 부부가 얼마나 장모님을 위해서 노력중인지를 서술할까도 고민하다가, 이미 제가 쓴 글을 보고 느낀 사람들의 반응에는 어차피 큰 영향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글이 건전한 토론의 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리고 말씀 드리면, 제가 다니는 회사는 남자의 육아휴직이 허용되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합당한 지적과 논리는 환영하지만 너무 날 선 댓글은 저에게도 아내에게도 상처가 됩니다. 저희도 나름의 노력으로 육아도, 커리어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도 온 힘을 다해 지켜보려고 버둥거리는 중이니까요. 저희 부부는 성인답게 각자가 책임을 지고, 가족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향을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