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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치의 장지혜 Sep 10. 2021

돌고래의 시간

내향치의

언젠가 깊은 바닷속에서 돌고래들이 무리를 지어 헤엄치는 짧은 영상을 보았다. 돌고래들은 투명한 바닷물 속에서 질서 있게 넘실거리며 조용히 헤엄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 같았다. 마침 댓글에도 너무 '혼란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아마도 같은 지구 안 에지만 너무도 다른 시간과 공간을 보고 있자니 느껴지는 현기증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짧은 영상이었지만 빨려 드는 듯한 강한 임팩트가 있었다. 깊은 바다 바닥까지 비치는 햇빛과 물로 가득 찬 그곳만의 세계에서 익숙한 듯 천천히 헤엄치는 그 무리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흔히들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다고 하지만 실제 체감하는 시간은 더디지 않은가. 나의 시간은 그것보다 조금 더 느린 것 같다. 문득 뒤돌아 보았을 때 시간의 흐름이 체감이 되는 것이지 그 시간 위에 올라타고 있는 나는 속도를 인지하지 못한다. 마치 쏜살같이 지나가는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속도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시간이 주는 특별하고 상대적인 느낌이 마냥 신기하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는데 공평함이 공평하지 않은 듯도 하고 절박함이 절박하지 않은 듯도 하고 체감하는 것이 너무도 다르다. 심지어 일개 개인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느껴지는데 이 또한 깨달음과 변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대성 이론에서도 차원의 축에서도 시간이 들어간다. 엄청나게 추상적인 개념 같은데 또 엄청나게 수학적이다. 

내가 흔히 다시 태어났다고 칭하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 전의 나와 그 후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그 변화와 깨달음으로 불리는 현상에서 나는 시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체감하고 그걸 계기로 움직인다.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그저 다시 태어났다 함은 죽음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것일 뿐이고 그 이후에 주어진 삶이 없었을 수도 있는 삶이기에 기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매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못내 어색하여 자꾸 빙빙 말을 돌린다. 이렇게 꼭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한다.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수명이 아주 길다면 몇 년을 주기로 이것저것 다 해 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리 길지 않다. 시간의 개념에는 낭비라는 표현은 있지만 저축이라는 표현은 없다.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표현은 있지만 그런 을의 관계보다는 내가 나의 시간을 주무를 수만 있다면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의 열차에 올라탈 수만 있다면 그 상태 그대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견디거나 즐길 것이다.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 모두 가슴 한가운데서 알싸한 느낌을 안고 폭풍전야 같은 불안감에 심호흡을 한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늘을 날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로운 느낌일 것 같았다. 그런데 돌고래 영상을 보고 나서는 그렇게 물속을 헤엄치는 돌고래가 되어 보고 싶었다. 무한하면서도 폐쇄적인 느낌이지만 그곳에서의 시간은 이곳과는 다를 것만 같아서. 나를 그저 넘실거리는 물결에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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