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지 못한 희망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지..
새벽 4시, 그냥 갑자기 잠에서 깼다.
몇 시쯤 됐나 싶어 폰을 봤더니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너무 익숙한 숫자여서,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남편이었다.
이혼 후 그 사람이 연락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모두 밤늦은 시간이었고, 아마도 술을 마시고 걸었을 테다.
(예전에도 술에 취하면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던 습관이 있었다.)
첫 번째때는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가 내게 큰 불행을 줬고, 그래서 본인이 벌을 받는 것 같다고. 앞으로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 것 같다고도 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엄밀히 말하면, 위안이 됐다.
헤어지고 엄청 잘 살고 있는 건 아니구나.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우고 새 출발 한 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한때는 좋은 소식에 함께 기뻐하고,
힘든 일에 같이 슬퍼하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그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말에
내가 상대적인 안도감을 느끼는,
그런 사이가 되어있었다
이번에는 왜 연락을 했을까.
전화를 받았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미안하다고 했을까.
내가 생각난다고 했을까.
미처 버리지 못한 미련이 불쑥 고개를 들며
잠에서 깼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날따라 왜 하필 일찍 잠들어서 전화를 못 받았을까. 놓친 전화가 괜히 아쉬웠다.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미 술에서 깼을 거고,
본인이 전화를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쌀쌀맞게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카톡 친구 추가를 한 뒤 메시지만 보냈다.
'자느라 못 받았어 ㅠㅠ 잘 지내고 있어?'
답장은 짧았다.
'그냥 해봤어. 쏘리.'
더 이어갈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래, 이거지.
나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싶어
익숙한 루틴대로 대화방을 나가고 친구 삭제를 했다.
이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아직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재결합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왜 깔끔하게 차단하지 못하냐며 답답해했다.
그래서 나는
전남편이 취해서 연락하는 걸 보며
‘그래도 내 생각은 하나 보다’ 하고
셀프 위안을 하는 거라고..
이혼 과정에서 부정당했던 내 존재 가치를 회복하는 수단으로 삼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의 마지막 말에
더 이상 답을 할 수 없었다
'그건 다 핑계 같고,
너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생각해 보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가졌던
남자 주인공에 대한 그 답답함이,
어쩌면 친구가 나를 보며 느낀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로테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도
혼자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키우며,
그 희망 때문에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그때의 내가 그러고 있었다는 걸.
깨지 않길 바라며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면 다시 비참해질 걸 알면서도
놓지 못했던 마음.
그가 아직 나를 완전히 지운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붙잡고
혼자서만 부풀어 오르던 시간들.
당시의 나는 참 많이 어리석었다는 걸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