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은 날
'우리 헤어져도 종종 만나서 밥이라도 먹으면 안 돼? 이혼해도 계속 친구로 지내면 좋겠어..'
내가 가정법원 주차장에서 그에게 했던 말이다.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을 영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했다
남이 되었지만
그가 내게 써줬었던 따뜻한 편지를 다시 읽으며
'과거의 우리'를 그리워했고
헤어지고 처음 맞이하는 그 사람의 생일날엔
축하한다며 기프티콘을 보내줄 만큼
나는 미련이 많았다
그렇기에
이혼 후 그 사람의 '만나자'는 연락은 더없이 기뻤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옷장에 있는 옷 중 제일 깔끔하고 예쁜 옷을 골랐고 평소 하지도 않던 악세사리를 착용했다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할까
그 사람이 후회하게 하기 위해서일까
적어도 '잘 헤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하고 싶었던 걸까
평소에도 긴장을 쉽게 하는 성격이지만
그날 그 순간의 떨림은 과도했다
어색하게 마주 앉아
그동안 잘 지냈는지,
회사 생활 이야기를 하고,
공통 지인들 소식을 전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편은 돌싱들 술모임에 나갔다고 했다
'여자들 이혼사유를 들어보니
고부갈등이 되게 많더라
우리 엄마는 안 그러는데..
참 다들 고생했더라..'
그들과 비교해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정으로
이혼하게 된 나를 앞에 두고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들으면서 궁금해졌다
전 남편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이혼사유는 무엇일지..
내가 치료 중이었다는 사실을 말했을지..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남편은 이미 시동이 걸린듯했다
'아 그중에 한 명이 따로 보자고 해서 만났어
너랑 동갑인데 나이는 좀 들어 보였어
근데 둘이서 술을 엄청 마셨거든?
결국 모텔에도 갔는데.. 하지는 않고 그냥 잤어
아니 근데 다음날 출근시간 늦어서
짜증이 나있는데, 여자가 우는 거야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나는 그냥 출근했어'
이혼 후에도 잘 나간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던 건지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완전히 접게 하고 싶었던 건지 필터링 없이 쏟아냈다
그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마음이 썩는 느낌이었고
몸이 녹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의 아내가 아니었고
친구로 지내자고 한 것도 나였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여자이야기
고대 출신인 어떤 애를 만났는데
걔네 아빠가 법조계에서 좀 높은 위치에 있나 봐
근데 걔는 내가 돌싱인 거 알고도 괜찮다면서
엄청 적극적이야
루이비통 키링도 한 50만원 하던데 그걸 선물해 주더라고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했을까
어리석었고 자존감 없었던 내가 했던 말은
'잘 나가네! 바쁘게 살고 있구나'였다
남편은 만족스러운 대화를 한 듯
'이렇게 종종 만나서 얘기나하자~'라며
나와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이 많아졌고
치료 중 남편이 했던 거짓말, 호텔 투숙내역, 이혼 직전 남편의 가방에서 발견한 필름형 발기부전 치료제(이미 복용 후 빈 껍질만 있었다. 그 사람은 진단 직후부터 내게 포옹 이상의 스킨십은 하지 않았는데 언제 사용한 것일까 의문이다)가 뇌리를 스쳤다
그때는 아니라고 믿었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고
그런 일탈은 본인의 커리어에도 걸림돌이 될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고들어 뭔가가 나왔을 때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이미 무너진 상황에서
또 하나의 시련을 나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고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았다
그런데 이혼 직후 남편의 행보를 보니
내가 열지 않았던 그 판도라의 상자에
무엇이 잔뜩 들어있었을지..
열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 사람을 만나고 얼마간 참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그리고 그때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썼다
다시는 그리워하지 말자.
그리고 절대 다시는 만나지 말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