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엔지니어가 고향에서 찾은 것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by The Way

박완서 산문집 "호미"를 읽다가 한 줄에 시선이 멈췄다.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한 문장이 가슴속에 묻었던 추억을 불러냈다. 내 고향은 강화도 서쪽 끝, 주문도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육지로 나온 뒤, 방학 때만 찾던 곳에서 고향의 파도소리가 들렸다.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이다. 노래 첫 가사에 코끝이 시려 온다. 이 노래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향한 애달픈 연가였다. 그러나 한국의 정서로 번안되어 백발과 함께 늙어가는 노부부의 회상으로 변모했다.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향수가 되었다.


이 노래가 내게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은, 생전에 장인어른의 애창곡이기 때문이다. 포도밭 이름마저 '동산 농원'이라 지으실 만큼 ‘동산’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갖고 계셨다. 장인어른의 애창 속에 인생의 무상과 회한을 읽을 수 있었다. 사위가 되어 그분이 지내온 어깨의 무게를 짐작해 본다. 잔디에 앉으면 세상 시름을 잊게 된다. 푸르름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 해진다.


지난가을 아버지 추모일에 고향을 찾았다. 고향친구에게 연락했다. 마침 그날은 탈곡하는 날이라 시간이 없다고 했다. 농사를 짓고 물때에 맞춰 해루질하는 고향 친구들의 시간도 분주했다. 친구가 사는 대빈창(大賓倉) 마을을 찾아갔다.


멀리서 보니 2인 1조로 논바닥의 볏단을 탈곡기에 넣었다, 늦장마에 벼가 쓰러져 반자동 작업만 가능했다. 그곳은 옛날과 다르게 많이 변해 있었다. 과거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유서 깊은 땅은 시설을 갖춘 현대식 해수욕장으로 변신해 있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응급환자를 위한 헬리콥터 착륙장이었다.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생명의 시급성을 위해 마련된 시설이다. 고향은 버려진 낙도가 아니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터전으로 변해 있었다.


섬의 남쪽 끝 살곶이도 변했다. 그곳은 화살촉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지형이다. 어린 시절 본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하늘로 솟구쳤다. 그 돌무더기 암초들이 선착장으로 변신해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이와 상관없이 배를 접안하는 선착장은 섬과 육지를 잇는 생활의 연결점이다. 암초들로 덮여 있던 곳이 이제는 사람을 맞이하고 보내는 선착장이 된 것이다.


약 2km의 백사장이 펼쳐진 뒷장술. 썰물 때면 광활한 갯벌을 드러내던 곳이다. 해당화 피던 시기, 우리는 그 백사장에 모여 전교인 야외 예배를 드렸다. 바다를 향해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바다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현장이었다. 그곳의 찬양과 기도는 섬 소년의 미래를 이끈 자양분이 되었다.


섬 앞쪽의 길게 뻗은 모래사장 앞장술은 푸른 청춘의 장소였다. 밀물과 썰물이 노래하는 곳에서 연인과 함께 걷던 기억은 아득하다. 갯벌은 말이 없었으나, 그 침묵 속에 수많은 생명이 꿈틀거렸다. 우리가 다하지 못한 말도 그 바닷속에 있었다. 썰물이 지나간 자리에 조개와 게의 흔적처럼, 우리도 서로의 인생에 작은 흔적을 남겼다.


명주골은 이름처럼 밝은 구슬이 발견되었다는 설화가 깃든 곳이다. 그 명주골로 넘어가는 언덕에 잔디밭이 펼쳐졌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이다. 그곳에서 소에게 풀을 먹였다.


세종실록(1431년)에 기록된 국가의 말목장이 있던 곳이다. 축구를 하며 잔디 위를 구르며 놀던 자리였다. 그 언덕에서 멀리 바다를 보며 그 너머 세상을 바라봤다. 지금은 저수지로 변했고 언덕의 잔디밭도 사라지고 저수지 뚝이 되었다.


여전히 몇 명의 고향 친구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 도시에 살다가 귀촌한 친구도 있다. 평생을 섬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켜온 친구도 있다. 그들의 삶은 고귀하며 존경받아 마땅하다. 단순히 땅을 지키며 산 것이 아니다. 고향의 그리움과 역사의 숨결을 보존해 온 파수꾼이다. 바다와 싸우고 땅을 일궈온 그들의 주름진 손이 주문도의 연대기다.


초등학교 고향 친구 12명의 단톡방에 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올린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그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청년 시절, 명절만 되면 고향을 찾고, 백사장과 잔디밭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던 우리들의 앳된 얼굴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사진 속의 우리는 청춘이었고,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노래를 불렀다. 그 사진을 보며 우리는 고향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해양 토목 엔지니어로 글로벌 기업에서 일해 왔다. 수섬과 살곶이의 거친 파도와 암초는 거친 해상 현장을 헤쳐 나가는 기초가 되었다. 고향의 바다는 자연의 야성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수섬의 거친 물살을 보며 조력 및 해상 풍력 발전기들의 에너지를 생각했다. 고향의 폭풍우가 내게 준 것은 거친 파도와 싸우며 헤쳐 나가는 엔지니어의 기질이었다.


이제 인생의 후반전에 글을 쓰며 지낸다. 엔지니어로 살았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명주골 금잔디 동산은 고향의 어린 시절의 풍경이었다. 뒷장술에 해당화가 있었고, 삶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모으고, 옛날은 문장 속에서 다시 이어진다. 오늘이 옛날에 닿았다. 금잔디 추억은 메기의 노래로 들려온다.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고향에서 찾은 것은 그 잔디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의 시작이었고 백발의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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