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거 못보고 죽을뻔 했네
"이런 거 다 못 보고 죽을 뻔했네." 제주 빛의 벙커 안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거대한 빛의 파도와 음악이 밀려오는 이 공간은 다른 행성이었다. 시니어에게 쇼킹한 세상이었다.
한 번 설계된 인생이 전부가 아니다. 해저 케이블 통신을 위해 지어진 벙커가 빛의 전시관이 되듯, 시니어들의 인생 역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버려진 인프라 벙커와 시니어의 두 번째 삶은 닮아 있다.
얼마 전까지 이곳은 국가 기간 통신시설이었다. 일본과 연결하는 해저 통신케이블을 지키던 비밀스러운 벙커. 군인들이 경계하며 출입을 통제하던 시설이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빛 속을 산책하는 공간이 되었다. 콘크리트 벙커의 변화 그 자체가 예술이었다.
이 날 전시는 칸딘스키의 '추상 세계와 음악적 영성', 파울 클레의 '음악을 그리는 회화', 그리고 '제주·죽음·신앙·자연의 순환'을 함께 엮은 장민승 프로그램이었다. 흐르는 장면과 음악을 따라 공간을 걷고 머물며 몸으로 체험했다. 50분 동안 벽과 바닥, 천장 전체에 영상이 쏟아졌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관람 후에 밖에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는 오래됐어요? 하루에 몇 명이나 와요?" "2018년에 오픈하고, 많을 때는 하루 2~3천 명까지도 왔어요. 요즘은 4~500명 정도요." 젊은 직원의 말 뒤로, 관광객의 발길이 줄어 염려된다는 사실이 겹쳐 보였다.
"2018년 제주에서 여기가 제일 먼저 생겼고요, 미디어 아트가 잘 되니까 애월의 아르떼 뮤지엄, 시내의 노형 슈퍼마켓 같은 데도 생겼어요. 제주에만 한 다섯 군데는 되는 것 같아요." 통신벙커 하나의 변신이, 제주도 전체 문화 인프라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해양 토목과 인프라를 평생 업으로 삼았던 나에게, 빛의 벙커는 아트보다 인프라 재탄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통신기술의 변화 앞에서 벙커가 쓸모가 없어졌을 때, 이 시설은 그대로 방치되거나 땅에 묻혀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콘크리트 공간에서 새로운 빛과 이야기를 발견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벙커들이 많다. 무안·양양·청주 공항, 부산 북항 자성대부두, 인천 청라 소각장. 한때는 국가 발전의 이름이었다. 이제는 애물단지다.
빛의 벙커가 보여주는 길은 다르다. 기능을 잃은 콘크리트 상자에 빛과 이야기를 입혔더니 일자리가 생겼다. 문화 예술 관광의 동선이 만들어졌다. 인프라는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른 역할을 맡는 무대였다.
나는 빈 활주로에 드론 택시가 내려앉는 장면을 떠올렸다. 노인이 앱을 열고 하늘길을 예약한다. 낡은 항만의 컨테이너 야적장에서는 청년들이 해상풍력 교육을 받는다. 소각장 굴뚝에서 빛이 도시를 밝힌다.
실패한 인프라 시설에 예술과 문화, 교육과 AI를 접목하면 세대 간의 경험도 함께 연결된다. 통신벙커를 지키던 세대의 기억 위에, 빛의 이미지를 즐기는 젊은 세대의 감각이 쌓인다. 시니어는 그 사이를 걷는다.
직원에게 물었다. "아트 미디어 전공이에요?" "아니에요, 저는 관광경영학과 나왔어요." 관광을 전공한 젊은 직원과 해양 토목을 평생 업으로 삼았던 시니어가, 미디어 아트 벙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다른 시대의 인프라를 살아온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을 매개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나는 미디어 아트가 생소했다. 그러나 이 벙커에서 분명히 느꼈다. 인프라의 두 번째 삶은 곧 사람의 두 번째 삶과 닮아 있다. 언젠가 텅 빈 공항 대합실이 생애 처음 드론 택시를 타는 노인들의 미디어 교실이 될 것이다.
항만의 낡은 컨테이너 야적장이 청년 창업가와 예술가들의 실험 무대가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그곳 어딘가의 한 자리에, "이런 거 다 못 보고 죽을 뻔했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또 다른 노인이 앉아 있기를 바란다.
버려진 제주 성산의 통신벙커가 미디어 아트의 성지가 되었듯, 잘못된 정책으로 비난받는 공항과 항만, 주민 갈등의 상징이 된 소각장과 유령 건물들도 언젠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드론 택시가 착륙하고, AI가 에너지 흐름을 설계하며, 사람과 도시와 자연이 다시 가까워진다.
그 길 위에서, 평생 해양 토목 인프라에 바쳤던 나는 이제 글쓰기로 두 번째 인생을 설계한다.
"이런 거 다 못 보고 죽을 뻔했네."
그날 빛의 벙커에서 중얼거렸던 그 말을, 나는 언젠가 빈 활주로 앞에서도 다시 중얼거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