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고 보관하다 망가졌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필기구가 나왔다. M사, W사, Pa사, Pe사, L사. 이름만 들어도 귀한 필기구들이다. 만년필, 볼펜, 샤프펜. 선물 받은 것도 있고, 구매한 것도 있고, 콘퍼런스 기념품도 있다. 어떤 것은 내 이니셜까지 새겨져 있다. 너무 귀해서 못 썼다. 아까워서 보관만 했다. 중요한 기록에 쓰려고 아껴뒀다. 특별한 날에 쓰려고 서랍에 넣어뒀다.
서랍에서 하나씩 꺼내 시험해 보았다. 어떤 볼펜은 잉크가 굳어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 리필심을 교체해야만 한다. Pe사 샤프는 작동하지 않았다. 내부 샤프심이 움직이지 않았다. AS센터에 전화했다. 홈페이지에서 접수하라고 했다. 보증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보증서는 없었다. 보증 기간도 지났다. 가격은 싸지 않았다. 너무 아깝다. 어떤 것은 표면이 끈적거려 손에 닿는 감촉조차 불쾌했다. 보관한 것이 아니라 방치했던 것이다. 굳어버린 펜촉을 보니 속상했다.
고급 볼펜의 잉크가 안 나오니, 연필 한 자루가 귀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60년 전 초등학교 육 학년이었다. 해병대 창설 기념일 4월 15일, 해병대 사령부가 낙도 학생들을 서울로 초청했다. 강화군과 옹진군 낙도에서 선발된 학생들 가운데 나도 있었다.
KBS 방송국, 청와대, 해태제과, 동아출판사등을 방문했다. 서울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큰 건물과 전차가 신기했고, 넓은 도로가 신기했다. 방문하는 곳에서 학용품을 받았다. 필통, 연필, 색연필, 공책, 사전. 나는 그때도 학용품이 받았으나 좋은 필기구는 쓰지 못했다. 너무 귀해서 아껴두었다.
그 후에도 고급 만년필과 볼펜은 외부 미팅에 사용하지 않았다. 분실할까 두려웠다. 누군가 달라고 하면 곤란할 것 것 같았다. 그래서 고이 모셔 뒀다. 서랍 속에서 세월만 보냈다. W사 볼펜은 굳어서 망가졌다.
아무리 굴려도 잉크가 나오지 않았다. L사 샤프는 몇 번 사용했는데 심이 걸려 나오지 않는다. 분해해 보니 중심선이 휘어진 것 같았다. 옛날에도 보관하다 제대로 못썼는데 후회가 됐다.
좋은 필기구를 손에 쥐면 기분이 달라진다. 마음이 부자가 된다. 실력이 늘 것 같다. 공부가 잘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기분을 누릴 기회를 내가 놓쳤다. 필기구를 아꼈으나 필기구를 망가트리는 꼴이 됐다.
필기구는 각자 다른 감각을 가진다. 잡히는 느낌이 다르고, 종이에 닿는 감촉이 다르다. 글씨가 써지는 느낌이 다르다. 펜촉의 무게가 다르고, 볼이 구르고 잉크 흐름이 다르다.
디지털 시대에 무슨 필기구냐고 묻는다. 그러나 종이의 질감과 써지는 감각이 다르다. 펜 끝에서 느껴지는 필감이 다르다. 손글씨는 속도의 한계 때문에 뇌가 정보를 걸러낸다. 핵심만 남긴다. 타이핑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데이비드 색스는 말한다. 몰스킨 노트는 디지털 시대에도 성장해 왔다. 손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라이프스타일이 됐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수단이 됐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정서적 위안을 준다.
이제는 필기구를 써야 한다. 아끼는 것은 사용하는 것이다. 보관이 아니다. 자녀가 선물한 M사 만년필과 샤프를 꺼냈다. 내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엔지니어로 일할 때도 나는 싼 샤프를 썼다. 좋은 것은 늘 서랍에 있었다. 이제는 보관하지 않고 쓰기 시작했다.
필사를 시작했다. 37일째다. 두 권의 책을 쓰고 있다. 손끝에서 글자가 이어진다. 샤프펜 끝에서 문장이 흐른다. 종이와 펜촉이 만나는 흐름이 좋다. 흑연이 종이에 스며들며 삭삭 소리까지 들린다.
물 흐르듯 써지는 Pa 볼펜도 꺼냈다. 편안하고 그립감이 좋아 이것으로 대부분의 노트를 한다. 서랍 속 필기구를 모두 꺼냈다. 굳은 것은 버렸다. 손질할 것은 AS 맡겼다. 수리할 수 없는 것은 포기했다.
아끼는 것이 늘 옳은 건 아니다. 쓰지 않고 보관하는 것은 방치다. 쓰지 않는 것은 마르고, 굳으며, 결국 망가진다. 나는 아끼며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물건도 소유될 때가 아니라 쓰일 때 존재한다. 서랍 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손에 쥐어질 때, 글을 쓰며 흔적을 남길 때,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이제는 인생의 좋은 순간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다. 특별한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 좋은 것은 지금 쓰는 것이다. 오늘이 가장 좋고 쓰기 좋은 날이다. 지금 쓰지 않으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