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감사패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승풍파랑

by The Way

인생의 파노라마

2024년 6월, 딸과 사위가 내 앞에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은퇴 즈음에 준비한 감사패였다. 금속판의 글자들을 따라가던 내 눈길이 멈춰 섰다. 순간, 쥐고 있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풍랑이 잦은 바다에 새로운 해로를 여는 것처럼, 오랫동안 열정과 정성을 다해 오신 아버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승풍파랑의 사업가로서, 헌신적인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늘 자기보다 가족을 먼저 챙기시는 따뜻한 아버지로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승풍파랑(乘風破浪)’.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 나간다는 그 말은 내 자부심이었다. 헌신적인 신앙인도 내가 추구했던 삶의 목표였다. 그러나 다음 문장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늘 자기보다 가족을 먼저 챙기시는 따뜻한 아버지.”


나는 과연 그런 아버지였던가. 감사패는 다른 곳에서 몇번 받았었다. 하지만 자녀들이 건넨 이 패는 그 어떤 것 보다 무거웠다. 그것은 내 과거를 들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나는 패에 새겨진 문구에서 내가 소홀했던 시간들을 돌아봤다.


변명의 기록

1982년 결혼 초, 나는 평택 LNG 인수기지 건설 현장에 근무했다. 국가적인 사업에 참여했고, 현장의 긴장감은 개인사정이 없었다. 정작 첫딸이 세상을 나오던 그 순간에도 아내 곁에 있지 못했다. 아내는 인천에서 혼자 육아의 짐을 짊어졌다.


밤마다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 신혼집의 외로움. 한 달에 2일 집에 들를 때면 아내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아내는 언제나 “괜찮다, 걱정 말고 일하시라”며 나를 배웅했다. 나는 월요일 새벽 평택 현장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것이 가족을 위한 최선이라 믿었던 무지였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다. 당시 나는 막 창업을 하여 유럽 회사와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부족한 영어를 배우려 새벽반 학원을 다니고, 새로운 사업 개발을 위해 기업체 방문과 출장이 빈번했다. 사람들은 나를 열정적인 사업가라 불렀다.


그러나 집 안에서 부족한 가장이었다. 딸의 성적표가 어떻게 변하는지, 아이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 것으로 내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아내는 내 빈자리를 메웠고, 나는 그것이 당연시했다.


서로 다른 두 사람

우리는 교회에서 만났다. 아내는 유복한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나는 가난한 집안의 3남이었다. 아끼는 습관이 들었고 쓰는 것이 두려웠다. 살림을 하면서 많이 부딪쳤다. 돈 쓰는 방식이 달랐고, 사람을 대하는 온도가 달랐다. 그렇게 수십 년을 함께 살았다. 이제는 서로 많이 닳아 있다. 모서리가 둥글어진 조약돌처럼 변했다.


자녀 교육, 아내의 퀼트

딸아이의 진로 고민을 함께 나눈 것도, 진학 상담을 위해 학교를 방문하는 것도 아내의 몫이었다. 딸이 결혼 후 타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뽁뽁이로 감싸고 짐을 포장한 것도 아내였다. 딸은 ”엄마 아프지 마 “라며 눈물지며 둘이 손을 꼭 쥐고 있던 공항의 이별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저 곁에서 ‘돕는 사람’에 불과했다. 주연은 아내였고, 나는 조연이었다.


딸이 외국에서 보낸 세월에서 우리는 기다림을 배웠다. 15년 만에 첫 손녀가 태어났을 때, 아내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딸의 산후조리를 돕는 아내의 헌신을 봤다. 내가 직장에서 일할 때, 아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가족의 구석구석을 챙겼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퀼트를 했다. 거실 의자에 앉아 한 땀 한 땀 바늘을 뜨는 아내의 손을 바라본 적이 있다. 작은 천 조각들이 아내의 손끝에서 여러 모양의 작품이 되는 것이 신기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인생의 작은 조각을 퀼트 바느질하듯 살았구나. 바느질 한 땀 한 땀이 기도였던 것이다.


내가 회사 일할 때, 아내는 바늘땀으로 가족의 흩어진 마음을 이어 붙였다. 딸이 멀리 있을 때, 외로울 때, 고민이 깊을 때, 아내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의견이 부딪칠 때도 있었다. 나는 논리적이었으나 아내는 감성적으로 주장하며 기다렸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삶은 논리만이 아니었다. 나는 주위의 평판에 흔들렸으나, 아내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감사패의 진짜 주인

책상 위에 놓인 감사패를 다시 본다. “늘 자기보다 가족을 먼저 챙기시는 따뜻한 아버지.” 이 문장은 내가 행한 업적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부재했던 시간에 아내가 딸과 사위에게 심어준 ‘아버지 사랑의 변주’였다.


아내는 딸에게 아빠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아빠가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내가 가꾸어 놓은 모습이었다.


이 감사패는 내 것이 아니었다. 이 패에 새겨진 영광의 주인은 아내다. 내가 ‘승풍파랑’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내가 가정의 앵커가 되어준 덕분이다. 일중독자라 불렸던 나를 ‘존경받는 아버지’의 자리에 앉혀준 것은 아내의 희생이었다.


이제 나는 인생의 황혼에 새로운 항해를 준비한다. 이제는 아내와 같이 노를 젓는다. 아내는 작품을 디자인할 때 내 의견을 물으며 퀼트천을 같이 고른다.


손녀의 화상 전화 웃음소리를 기다리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꿰매며 살고 있다. 책상 위 감사패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패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내가 쓴 감사패를 건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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