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유통기한
숫자의 성벽
오늘도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삭제했다. 초성 "ㄱ"에서 360개를 지웠다. 아직 남은 이름이 2,530개다. 노트북 데이터베이스에는 5,800명이 들어 있다. 그 숫자들을 바라보았다. 왜 이런 숫자를 짊어지고 살았을까? 그것은 46년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었다. 인맥이 넓을수록 문제 해결을 잘 할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 였으며 은퇴와 동시에 그것은 사라졌다. 이름은 지워지고 정적만 남았다.
인연의 유통기한
제품에는 수명 주기가 있다. 도입기,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를 거쳐 결국 사라진다. 인간 관계도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만남 후에는 분명히 헤어짐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줄어든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 그럴까 생각했지만 나중에 수긍하게 됐다. 관계의 계절은 때와 시기에 맞도록 이어진다. 각 단계에서 최선의 삶을 살지만 유통기한이 있다. 모든 관계는 언젠가 재설정해야 할 때가 온다.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이치다.
학창 시절의 친구는 교문 안에서 완성되었다. 30대의 관계는 건설 현장에서 동료와 같은 목표를 향해 호흡을 맞췄다. 40대의 만남은 글로벌 기업으로 이직하여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며 이어졌다. 50대에 동료 부친상 장례식장에서 만난 옛 동료와는 악수만으로 충분했다. 반가웠지만,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그 관계의 계절이 바뀐 것이다.
각 시기의 관계는 그 시절에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다.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간극이 생긴다. 억지로 붙잡기보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다. 이별이라기보다는 변화에 대한 인정이다.
던바의 수
옥스퍼드 대학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한 사람이 안정적인 사회적 관계를 유지 할수 있는 인원수는 150명 내외라고 했다.이것을 던바의 수 (Dunbar's Number)라고 한다. 인간의 뇌는 유한하고 시간은 흐른다. 150명은 언제 만나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친밀감을 가진 관계를 의미한다. 수만 명의 팔로워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이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던바의 수는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중심 원의 5명은 친밀한 핵심층과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다.
그 다음 원은 15명으로 슬픔이나 기쁨을 깊이 공유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다.
좀 더 큰원 50명으로 친척 및 지인, 정기적으로 만나며 친하게 지내는 집단이다.
던바의 수 원은 150명 으로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어떤 관계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다
이렇듯 숫자로 정리하면 간단하다. 그런데 그 숫자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간단하지 않다.
이십 년 전, 외국인 친구와 우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친구는 둘이야." 19살 부터 홀로서기를 해온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네트워킹에 열심하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 '둘'이라는 숫자. 그것은 던바 원의 가장 안쪽이었다.
그의 '둘'이 나의 핸드폰 안의 사람수 보다 무거웠다. 비즈니스의 만남은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2,890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던바의 원 안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몇명이 안 됐다. 나도 누군가의 중심원에 드는지도 생각했다.
재설정의 시간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냉정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버림이 아니라 재설정이다. 인연이 다한 관계를 붙잡으면 과거에 묶여 산다. 지금의 나와 방향이 다른 사람을 안고 있으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지우고 번호를 지운다. 상실이 아니라 정돈이다. 공백이 아니라 자리 비움이다.
남는 온도
인연에는 때가 있다.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다. 채울 때가 있고 비워줘야 할 때가 있다. 그때를 알아채는 것이 삶의 지혜다. 핸드폰에서 지운 이름들이 아깝다. 그러나 저장해 둔다고 돌아오는 관계는 없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두는 것. 그것이 내가 깨달은 인생의 태도다.
교실의 봄, 빌딩 거리의 여름, 건설 현장의 가을, 장례식장의 겨울. 계절은 지나갔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때 그 시절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내일도 핸드폰을 열고 이름을 지울 것이다. 그리고 말없이 옆을 지켜준 사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공감해 준 사람, 오래됐지만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남겨둘 것이다.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이름이 아니다. 함께했던 시절의 온도다. 수천 개의 이름이 빠져나간 자리는 공백이 아니다. 나를 품어줬던 사람들이 머무는 여백이다. 던바의 가장 안쪽 원. 그 좁고 깊은 자리에서 마주 잡은 손의 체온만으로 충분히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