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씨 Feb 20. 2022

인연에 대한 새로운 고찰

"엄마. 그거, 그거 어디 있지?"


아이가 예전에 갖고 놀던 장난감을 찾을 때가 있다. 그거. 가 뭔지 알 수 없기에 한참 동안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아, 그거! 하면서 서랍을 뒤져 찾은 헌 장난감을 아이의 손에 쥐어준다. 색이 바래고 헤지고, 심지어 고장 나서 소리도 안나는 장난감을 손에 든 아이가 씩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는 마치 처음 만지는 장난감처럼 신이 나서 갖고 논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나와 '다른' 것들을 '틀리다'라고 치부했던 어리석은 시절이 있었다.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은 어차피 가까워져도 서로 마음 상할 수 있으니 그냥 한 발 물러선 관계가 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늘 프로젝트 식으로 팀을 꾸려서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고 여겼다. 일을 통해 만난 이들은 일을 할 때까지만 소통하는 게 편했고, 그 이후엔 건조한 사이가 되곤 했다.


이따금씩 마음을 쏟았던 인연도 있었다. 주로 함께 일을 했던 후배들이었는데, 같은 직업을 가진 좋은 선배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나름대로 진심을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제대로 닿지 않았던 건지 세상에 좋은 선배란 존재할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역시나 편한 관계로 남은 후배는 그리 많지 않다. 아이를 낳고, 잠시 일을 내려놓은 후에 평소에는 물론 명절에도 침묵을 지키는 카톡을 보면서, 친정엄마와 남편, 그리고 쿠팡만이 건재한 휴대폰 기록을 보면서 지금껏 내가 사람을 대했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나랑 안 맞아.


내가 아닌, 남이 겪은 이야기만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며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순간들이 많았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인 도구인 지 잘 알면서도, 다른 이들의 말에 많은 영역을 내어주었다. 그래서 새로운 인연을 대할 때마다 남들이 이야기해 준 그 사람의 평판에 기대어 상대방을 대하곤 했다.


나도 힘들어.


늘 나의 입장과 상황, 감정에만 치중해 있었다. 상대방의 마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배려하지 않았다. 내가 힘들고 고단해서 다른 사람의 입장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외치면서 늘 나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조금이라도 진심을 주었던 상대방이 내가 준 만큼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때. 나의 친절과 배려를 그냥 당연하다고 여길 때. 참 분하고 화가 났다. 그냥 모질고 차가운 선배가 될 걸. 괜히 마음 알아준답시고 잘해줬는데 나에게 돌아온 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상대방이 내가 쏟은 만큼 반응하고 고마워하길 바랐다.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나보다 아이의 마음을 살피는 엄마가 된 후에.


어려도, 심지어 아이가 말을 못 할 때에도 아이의 행동과 말, 감정의 표현에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촘촘하고 섬세한 정서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을 때 우는 것이고, 엄마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듯할 때 화가 나고 불안해하는 것이며, 아이의 행동보다 엄마의 잔소리가 앞설 때 짜증이 나고  서운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매일매일 아이의 마음을 살피고, 혹여라도 눈치채지 못했던 감정들은 없는지 찾아보면서 진정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나를 스쳐간 모든 인연들에게 늘 나의 입장과 생각만을 표출했던 과거의 나를 대면하게 되었다. 미리 사람을 평가하고, 적당하게 거리를 두며 내가 스트레스받을까 봐, 혹은 상처받을 까 봐 한 걸음 물러났던 모든 순간들. 그리고, 나의 호의와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이들을 향했던 나의 날 선 시선들이 보였다.


모든 존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나는 늘 '나의 이유'만을 살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편하려고, 복잡한 상황이 되는 게 싫어서, 어차피 어릴 때 친구들 아니면 길게 갈 인연은 없다고 규정하면서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던 수많은 인연들을 밀어내며 살았던 것 같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모든 인연들에게.


어떤 통로를 통해 만날 지 알 수 없지만, 나를 스쳐가게 될 이들에게 나를 마주한 그 순간만큼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예의와 친절로 진심을 다하고 싶다. 함부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좋은 기억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의 한 마디 말과 한 순간의 눈빛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도 나를 스쳐간 인연이 그 순간의 나를 떠올리며

기분 좋은 찰나를 느낄 수 있기를.


낡고 해진 장난감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해맑은 얼굴로 환대해주는 내 아이처럼.   

 






 

  





작가의 이전글 공백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