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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씨 Feb 18. 2022

공백은 없다

"엄마, 공룡은 왜 사라졌을까?"


아이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다. 하루종일 공룡 장난감을 갖고 놀고, 공룡 그림책을 보고, 공룡 스티커를 붙이면서도 지금, 이 지구상에 공룡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올 때마다 질문한다. 공룡이 사라진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건 사람들의 추측이야. 라고 설명하면서도 확실한 사실은, 적어도 우리집에는 공룡이 살아있다. 크기만 작아졌을 뿐. 집안 곳곳에, 아이의 마음 속에, 그리고 아빠 엄마의 머릿속에도 아주 생생하게 건재하는 존재가 되었다.  


문득, '나'라는 존재가 흐릿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다. 하루종일 아이를 돌보고, 모든 게 아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삶이 계속되다보니, 이전의 나의 일상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 있었다. 1년에 책 한권도 읽지 못했고, 사람들 사이의 이슈나 유행하는 노래 등 모르는 게 많아졌다. 뭔가 말을 해야하는 데 단어나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다가 이상한 말을 뱉어서 온 몸으로 민망함을 느꼈다. 그래도 명색이 방송작가였는데, 트렌드에 어둡고 말까지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된 나를 마주하는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는데, 나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정체되어 있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 이런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렇게나 깊고 넓은 공백을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그땐, 그게 '공백'이라고 생각했다. 


종일 아이를 돌보고 겨우 재우고 난 뒤에도 밀린 집안 일에 치여 쓰러지듯 잠을 청하고 나의 일상, 나의 것을 누리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 육아에 올인하느라 나의 커리어는 멈춰버렸고 단 한 글자의 글도 쓰지 못한 채 흘러간 시간들이 깊고 어두운 공백을 만들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공백을 넘어 나의 삶이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느꼈던 시절도 있었다. 시집 가서 애까지 낳은 딸이 걱정되어서 매일 찾아오는 엄마가 아이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준 걸 알고는 불같이 성을 내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하루 내내 온 몸으로 투쟁하듯 일하고 온 남편에게 환대는 커녕 힘들다는 티만 내던 나의 초라한 인격은 공백을 뚫고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공백은 없다.


부모가 되면, 아이를 통해 만나는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 그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순순히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한다. 자신들의 행동이나 말이 행여 아이에게 작은 상처나 아픔이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치열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고자 애를 쓰는 모든 순간들은 결코 공백이 될 수 없다.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커리어가 되진 않을지라도, 존귀한 한 생명을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을 내려놓는 삶의 여정은 충분히 거룩하다. 그러다 문득 세상이 주는 공허함이나 외로움이 치일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다시 자신의 삶으로, 부모의 역할로 돌아가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공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의 삶을 목격하는 아이를 위해 강하고 단단한 존재가 되고 싶어진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것은 

공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전에 몰랐던 세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감정을 느끼며, 지나쳤던 이야기들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육아에 지쳐  블랙홀 같은 인생의 공백을 느끼며 구멍난 인생을 마주하고 있는 모든 부모에게.


우리에게 공백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 아이와 함께 자라고 있다.  

아이도, 부모도 서로를 믿는만큼 자란다. 세상의 모든 공백을 다 메울만큼, 크고 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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