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한 빛깔을 자랑하는 과일과 방금 씻어낸 듯 싱싱한 자태를 선보이는 채소가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다. 세 살 아이의 작은 손에 이끌려 온 초식 공룡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다. 두두두두 불꽃은 없고 소리만 나는 색종이만 한 가스레인지 위에서 두툼한 스테이크가 구워진다. 다 익었다 싶어서 하얀색 접시 위에 올려놓자 아이가 쿵쿵 입으로 소리를 내며 육식 공룡들을 줄 세운다. 엄지손가락만 한 하늘색 컵에 보이지 않는 물을 따라준다. 아이는 새벽마다 공룡들을 위해 정성스러운 한 끼를 차린다.
아이가 두 돌 될 무렵이었다. 백화점에 갈 때마다 전시된 주방 놀이 앞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기심 어린 시선만 던졌다. 그다음엔 장난감 식자재들을 만지고, 이후엔 요리하는 흉내를 냈다. 작은 손으로 노는 모습이 예뻐서 냉큼 주방 놀이를 사 주었다. 그리고 놀이에 익숙해진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공룡 장난감에 음식을 차려주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놀이에 피곤한 내가 초식 공룡에게 고기를 주었다가 아이에게 혼이 났다. 접시에 빵을 담았더니 공룡에게 밀가루 음식을 주면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다그쳤다. 한동안 계속된 아이의 주방 놀이는 재미를 넘어 정성스럽고 성실한 의무처럼 보였다. 아끼는 존재에게 맛있는 밥을 먹이고 싶은 따뜻한 마음이었다.
엄마는 아침 식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갓 지은 밥과 금방 끓여낸 국, 식탁에 앉는 순간 참기름에 무친 고소한 나물이 등장하고, 밤새 짭짤하고 달콤한 양념 옷을 입은 고기가 프라이팬에서 구워졌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절박한 응원의 방법이었다. 엄마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행여라도 상처받고 아플지라도, 그것을 견디고 버틸 힘을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밥을 입에 욱여넣으면서도 투정 부릴 수 없었던 건 밥상 안에 소복이 담긴 엄마의 기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학창시절 중 딱 한 번, 피곤함에 지친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던 날, 빈속으로 등교하는 나를 보며 죄지은 사람처럼 쩔쩔매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호되게 다그치며 미안해하던 얼굴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의 밥상은 상황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식탁에서 엄마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엄마는 매 순간 정결하고 귀한 사명을 이루듯 밥상을 채웠다. 하지만 엄마 자신을 위한 밥상은 가난했다. 후루룩 금세 먹는 라면이나 국수가 주식이었다. 자꾸 밀가루 음식만 먹다 보니 소화가 안 돼서 끙끙댔고, 나는 엄마에게 밀가루를 끊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이제 엄마가 된 나는 식사 시간이 되면 자꾸 라면을 찾는다. 아이가 먹을 밥을 차리지만 내 밥은 담지 않는다. 라면 하나로 때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엄마의 끼니가 왜 간소했는지 알게 됐다. 온종일 집안일에 치이고, 가족들 뒷바라지에 녹초가 된 엄마는 자신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목마름이 일상이 됐다. 허기지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나는 자랐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어른에서 엄마로. 부모는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하지만, 엄마의 오래된 허기는 채워졌을까.
엄마의 부엌에는 작은 창문이 있다. 엄마는 그 네모난 세상이 어두울 때부터 다시 캄캄해질 때까지, 쉬지 않고 밥을 지으며 하루를 짓는다. 사각사각 칼로 식자재를 썰고, 보글보글 찌개가 끓고 치이익 밥이 익어가는 소리에 둘러싸여 수십 년을 보낸 엄마는 여전히 같은 모습이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칭얼대던 딸이 자라서 엄마와 비슷한 일상을 보내며 허덕이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엄마는 자신의 허기를 여전히 뒷전에 둔다. 때론 오랫동안 쌓인 허기가 텅 빈 마음과 어우러져 엄마를 짓누른다. 치열하게 살았던 지난날의 엄마가 지금의 엄마를 원망할 때도 있다. 몸도 마음도 챙기지 않았다고 분노한다. 하지만 엄마는 외면한다. 그것이 엄마가 선택한 삶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엄마의 오래된 허기를 채울 방법은 없다. 씁쓸해진 입맛을 깨울 음식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밥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하루걸러 한 번씩 손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반짝이는 은색 도시락통에 빛깔 좋은 반찬을 꾹꾹 담아온다. 두 손 가득 싱싱한 제철 과일을 들고 오는 날에는 문 밖에서도 달콤한 향내가 난다. 반찬을 들고, 과일을 안고 오는 엄마의 발 소리를 들으며 산다. 엄마의 오래된 허기에 갓 지은 촉촉한 밥 한 숟갈을 얹어주고 싶다. 타들어가는 갈증을 채우고 잃어버린 입맛을 돌려주고 싶다.
밥솥에서 소리가 난다. 구수한 밥 냄새가 집 안의 공기가 된다. 콩나물국의 말간 국물이 끓어오르고 간장과 꿀에 재워놓은 고기가 익는다. 이른 시간부터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가 배가 고프다며 달려온다. 아이의 작은 입에 밥을 넣어준다. 잠시 망설이다가 내 입에도 한 숟가락 밥을 넣는다. 말랐던 입에 온기가 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엄마의 오래된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잃어버린 끼니를 되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내 마음 같지 않아도,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르는 날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