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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산 Oct 25. 2021

평화유지군,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평화”를 모르는 평화유지군 ⑥

 유엔의 평화유지군 감축계획에 따라 요르단 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상록수부대는 요르단 부대의 관할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처음 부대이동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신이 났다. 매일 사무실 근무하느라 부대 밖에 나갈 기회가 많지 않던 나에게 부대이동은 동티모르를 구경할  있는 좋은 기회처럼만 느껴졌다.


 요르단 군의 주둔지는 인도네시아 영토인 서티모르 안에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오쿠시(Oecussi) 지역이었다. 티모르 섬은 15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았는데, 오쿠시는 포르투갈인들이 티모르 섬에 처음 정착한 상징적인 지역이란 이유로 인도네시아가 서티모르를 차지한 이후로도 동티모로의 영토로 유지되고 있었다.



 상록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로스팔로스가 동티모르의 동쪽 끝이라면, 오쿠시는 동티모르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부대 전체가 한 나라의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으로 대이동을 하게 된 것이다. 부대이동 소식에 마냥 들떠있던 나는 본격적인 준비작업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부대이동이 얼마나 큰 작업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부대이동에 필요한 각종 행정처리로 평소보다 일거리가 많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사용하던 물건 가운데 주민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류하고, 새로운 주둔지인 오쿠시로 보내야 하는 물품들을 하나씩 정리하여 컨테이너로 옮기는 작업 등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 상록수부대 제5진 파병 기념 앨범


 컨테이너를 나르는 지게차와 대형트럭이 쉴 새 없이 오가고, 현지인들에게 전달할 600인분 대형 취사기구와 발전기, 24인용 텐트 등을 선별하는 것으로 큰 작업들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상록수부대에게 도움을 주었던 로스팔로스의 유엔 관계자들과 지역주민 등을 초청해 작별행사를 갖고, 지역의 치안을 새롭게 담당할 동티모르 방위군이 부대 안으로 들어오면서 부대이동을 위한 준비는 끝이 났다.


 동티모르 방위군들은 늘상 봐오던 현지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부대 근처에서 만나던 지역주민들은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들판에서 소를 키우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동티모르 방위군은 검정 베레모에 전투복까지 갖춰 입은 각잡힌 군인들이었다. 더구나 방위군 대부분이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와 내전 당시 실제 전투 경험이 있는 훈련된 병사들이란 이야기를 들으니, 상록수부대가 떠난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현지 방위군과 임무교대가 마무리되면서 곧 부대이동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부대 밖을 나와 마주한 동티모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파병 첫날 동티모르의 첫인상은 무더위와 폐허, 가난과 척박함이었지만 파병 3개월이 지난 뒤 내 눈에 들어오는 동티모르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 상록수부대 제5진 파병 기념 앨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아 오염되지 않은 산과 들판, 코발트색의 푸른 바다가 보였고, 빗물로 불어난 물 웅덩이에 뛰어들어 신나게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유가 느껴졌다.


 파병 초기 길가에 드러누워 있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게으르게만 느껴졌지만, 동티모르의 무더위를 겪어 보니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생존의 본능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동티모르에서 직접 3개월을 살아보니 비로소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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