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또 홀로 돌아온 워싱턴 디씨

by 마그리뜨



12월로 넘어가면서 집에 있으면 숨을 쉬기가 힘든 순간들이 왔다. 늘 비가 오는 시애틀의 겨울 공기란 너무나 차고 청량해서 그런 답답함이 덮쳐오면 동네 호수를 걸었다. 찬 공기를 폐에 잔뜩 넣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하루 종일 산책을 기다리는 강아지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쯤 출장이 걸렸다. 워싱턴 디씨에 있는 미국 본사.


디씨는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간 도시였다. 대학 시절, 중국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날아온 친구와 함께 보스턴과 뉴욕을 구경한 후, 그녀는 일정 상 뉴욕에 남고 나는 동부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워싱턴 디씨를 택했다.


15년 전쯤 디씨에서 무엇을 했느냐,라고 하면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쁜 고양이가 있는 에어비엔비에서 머물렀고, 백악관을 먼발치에서 구경했고, 백악관 근처에서 가판대에서 워싱턴 디씨가 써진 키링을 하나 샀다. 국회의사당부터 링컨 메모리얼까지 내셔널몰을 걸었는데 그때도 국회의사당은 들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의 취향이란 크게 변하지 않으니, 아마 내셔널 갤러리에 갔을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건, 워싱턴 디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는 기억이다.


무슨 이유에서 디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으나 15년이 지나 굳이 곱씹어보자면 미국이면서도, 보스턴을 제외하면 가장 유럽 스러운 도시라는 점. 건물들이 낮고, 분위기가 점잖다는 점. 미국과 국제 정치의 파워 센터인 것도 좋았다. 뉴욕만큼 혼잡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와 교육의 색이 분명했고, 사계절이 비교적 뚜렷하며, 어딜 가도 밥이 맛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서부보다 훨씬 클래식하고 고급스럽다.


조금만 더 일찍 본사 출장을 올 수 있었더라면 더 일찍 꿈을 꾸기 시작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이야말로 내가 이곳을 와야만 했던 타이밍이다. 나는 완벽한 타이밍에 분명한 자극이 필요했다.


번개를 한 열 방쯤 맞고 나서야 모든 것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독일이 너무 좋았던 이유도, 여행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잦은 출장을 다녔던 시간들도, 발목을 다쳤던 것도,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졌던 것도, 하필 이 시간에 본사에 출장을 나온 것도, 우주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른 중반을 넘어가며, 나는 한 곳에 눌러앉아서 살 수 있는 운명이 아님을, 무엇인지 지금은 알 수도 없는 꿈과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자율성과 독립성이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가장 큰 키워드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어째서 내가 나임을, 내가 남이 아님을 인정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남들같이 살 필요는 절대로 없고, 애초에 그럴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생에 어느 정도 정해진 속도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 나를 비춰보면, 내 인생은 늘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은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내 인생은 한번 더 불안정해질 것이고 한 템포 더 느려질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흔들리더라도 천천히 나의 길을, 나만의 속도로 걸을 수 있는 용기와 평화가 나와 함께한다면. 나는 꿈을 꾸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의 집이라고 부르던 그를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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