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디씨에서 만나는 한국의 보물, 이건희 컬렉션

by 마그리뜨



한국 방문때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늘 내 버킷리스트였다. 하지만 서울에만 가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야하고, 미용실과 병원을 순회하느라 미술관까지 갈 여유가 없었다. 최근 한국을 방문했을 땐 하필 케데헌이 난리가 나서 국중박을 들어가려면 줄을 몇시간을 서야한다는 둥 말이 들려서 방문을 포기했다.


그 이전엔 엄마가 이건희전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 윽, 부럽군, 나는 언제 가보지, 하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게도 내가 워싱턴 디씨를 방문할 시기에 이건희 전이 DC에 와있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꼭 보고말리라 다짐했다.


이 전시는 이건희가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한 작품들을 National Gallery of Asian Arts 에서 대여해 열린 전시였는데, "Korean Treasures" 라는 말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 모아온 콜렉션이라, 아주 기대가 된다. 그의 가족이 나라에 기증한 작품이 23,000작품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것들은 삼성의 창립가, 그의 아버지인 이병철 때부터 모은 작품들은 물론, 부인이었던 홍라희 여사가 모든 콜렉션도 포함이라고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을 맞이하는 책가도. 처음에는 왕에게 헌사하기 위해 제작되었지만, 이후 양반들 사이에서도 소장 욕구를 불어일으킨 주제라고 한다. 책을 중심으로 그당시 청나라를 통해 들여왔을 진귀한 붓, 물감, 그리고 안경처럼 중국을 통해 유럽에서 들어왔을 물건들까지 -- 지식과 세계에 대한 욕망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일월오악도: 해와 달과, 다섯개의 산봉우리들. 왕을 위해 만든 작품으로, 왕좌 뒤 병풍으로 세워져있는 그림이다. 자세히 보면 파도의 표현이 유난히 생생하고 귀여운데, 이후 다른 그림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파도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의 국보,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경복궁 뒤로 보이는 비가 온 뒤 안개가 자욱한 인왕산을 그렸다. 정선은 인왕산 자락에서 태어나 평생을 인왕산을 오르내리며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고 하니, 인왕산에 얼마나 애정이 가득했을 지가 느껴진다. 엄마가 몇년 전에 인왕산을 데리고 가줬었는데, 기억 속 인왕산은 정말 저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도 몇 점 전시되어 있었다. 김홍도의 그림은 교과서에서 늘 말했듯, 해학과 여유, 유머가 넘친다. 곧 거칠어질 물살도 모른 채 나룻배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는, 살짝의 미소를 띄고 있는 어부. 재밌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반해 신윤복은 어두운 밤, 무슨 이유에서 출타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양반집 자제의 규수의 모습을 그렸다. 그녀가 오밤 중에 외출하는 이유는 뭘까?



김홍도는 익살스러운 그림만 그리는 화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진지한 그림도 멋있다. 유교 사상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상징하는(?) 바나나잎, 연꽃, 국화(?), 소나무 등 사군자 매난국죽은 아니지만 유교 사상에서 상징적으로 유사하게 쓰이는 대상들을 그렸다.



왠지 모르게 요즘 핫하게 느껴지는 달항아리. 참 단정한 것이, 말갛기도 하다. 윗쪽과 아래쪽을 따로 구워 접합하는 형태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외에도 분청사기, 고려청자, 조선의 백자 등 도자기 작품들이 아주 많았다.




조선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삶의 경로, 평생도. 탄생, 결혼, 과거 급제, 자녀 출산, 혼인 60주년까지—장수를 기원하며 그린 여덟 개의 인생 단계가 담겨 있다 이때부터 교과서적인 삶의 방향성과 마일스톤이 정해져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았던 피사로의 그림처럼,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놀랄 만큼 디테일하고 귀엽다. 차이라면, 이 그림 속 사람들은 모두 또렷한 눈코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조와 정조 시대에 영의정을 지낸 김치인이라는 인물의 초상화이다. 공자의 유교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조선에서는 초상화를 그릴 때 수염 한올이라도 다르다면 그것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초"현실주의적인 표현을 해낸다. 더구나 이 초상화들은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후손들이 그들을 기리는데도 쓰였기 때문에, 사실적인 정확함을 집요하도록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 회화에서 어떤 한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배경이나 소품이 사용되었다면 한국의 초상화는 입고 있는 옷과 자세만으로 위엄과 절제, 그리고 그의 정신세계 까지 담아내려 노력했다.




이건희 전만 보기에도 양이 워낙 방대해서, 다른 동양화들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나오면서 불상이 가득한 방을 하나 만났다. 아시아 문화를 얘기하면서 부처님은 빼놓을 수 없지. 들어가서 10분쯤 앉아있으면서, 수많은 부처님들에게 나에게 평화를 달라고 부탁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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