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았다.
2007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아빠에게는 그가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하여 리서처로서 연구를 하며 지낼 수 있는 1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워싱턴(시애틀)과 텍사스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빠는(엄마와 나는 시애틀을 외쳤지만) 결국 텍사스를 선택했고 우리 가족 네 명은 2007년 7월, 텍사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학창 시절 나는 전교 1등은 못했어도 반 1등은 놓쳐본 적이 없었다. 주입식 교육에 최적화된, 내가 이것을 왜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없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하는 그저 남을 이기는 게 좋아 공부를 열심히 했던 학생이었다.
그러던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엄마가 담임 선생님을 방문해 가족이 1년간 미국을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담임 선생님은 지금 이대로만 하면 멀쩡히 좋은 대학 갈 수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애매한 나이에 미국이 웬 말이냐며 놀래셨던 듯했다. 정말 기뻤다.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벗어날 수 있다니. 그 당시 나는 외고 입시에 실패한 후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삶의 가장 큰 실패는 외고를 가지 못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자존심이 상해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 나는 자격 충족으로 서울 특별(심지어 성적 우수자로), 일반, 경기 특별(심지어 성적 우수자로), 일반, 총 4번의 시험을 쳤다. 그리고 4번 다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실패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절망에 빠진 채로 원하던 고등학교 생활을 하지 못했으니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외고를 떨어졌기 때문에 미국에 사는 시나리오가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살뜰히 싸놓은 8개의 이민가방을 들고 우리는 텍사스에 도착했다. 미국 고등학교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던 나는 개학 첫날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며 그 날 있을 수업의 교과서를 가방에 모두 짊어지고 갔다. 미국의 교과서는 한 권 한 권이 백과사전 수준이라 교과서는 집에서 공부하는 용도이고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빌려주거나 한다. 점심시간은 외로웠고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들은 무서웠다. 집에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짊어지고 있던 백과사전 때문에 무거웠던 어깨가 서러워서, 이 낯선 환경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엄마를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친구들이 생겼고 학교 축구팀에 들기로 했다. 아무리 내가 유아 스포츠단 출신에 구기대회에서 골을 넣어 같은 반 친구들에게 감동을 줬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스쿼시를 치러 다녔다지만 결국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에게 학교 스포츠팀이라는 너무 벅차다는 것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해서 격일마다 두 시간씩 운동장을 뛰고 축구를 하고 학교가 끝나면 또 남아서 축구를 하고 경기가 있으면 경기를 뛰러 다녀야 했던 1년이었다. 축구가 제일 힘들었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기억 속에 가장 진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한 시간들이기도 하다.
특히 학교 대항 전 축구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트랙의 4바퀴인 1마일(1.6km)을 7분 30초 내에 달릴 수 있어야 했는데 모든 운동을 다 좋아해도 달리기를 못하고 싫어했던 나에게는 아무리 달려도 깰 수 없는 기록이었다. 결국 테스트 때 내가 달리지 못할 걸 알았던 친구들이 앞에서 손잡아주고 뒤에서 밀며 같이 뛰어줘서 겨우 시간에 맞춰 골인했는데 목구멍에서는 피비린 맛이 났다 (피가 나지는 않았다).
(미국의 여느 고등학교에나 기본으로 깔려있는 트랙과 풋볼 필드와 잔디 축구장이 나는 그렇게 부러웠다. 땅이 넓으니까 가질 수 있는 럭셔리이지만 나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체육 시간에 남자애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여자애들은 등나무 밑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게 정말 너무 싫었다)
피칸 시즌이 되면 학교에 넘쳐나는 피칸 나무 밑에서 피칸을 잔뜩 주워서 집에 가 망치로 깨 먹었던 것도(그렇게 바로 먹는 피칸은 정말 고소하다), 축구가 끝나고 집에 올 때면 너무 허기가 져 자주 먹었던 웬디스의 달러 치킨 버거도(얘 때문에 인생 최고 몸무게를 경신하기도 했다), 축구 경기를 하다 헤딩을 정통으로 맞아서 엄청나게 큰 박수를 받았지만 막상 나는 골이 딩딩 했던 것도, 이제는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미국에서 주어진 시간은 단 1년이었으니 한 학년 과정을 마치고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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