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남는 시간 동안 이 씨 가족은 텍사스부터 워싱턴까지 자동차로 미국 종/횡단 여행을 했다. 말이 텍사스에서 시애틀이지 장장 2주가 넘는 40시간 이상을 운전하는 여행이었다. 산타페, 그랜드 캐년, 라스베가스, 샌프란시스코, 요세미티, 포틀랜드, 시애틀을 포함한 서부의 자연 명소와 대도시들을 지나가며 좋은 기억을 참 많이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 피어 39에서 동생과 처음으로 인앤아웃을 먹으면서 도대체 이건 무슨 맛으로 먹는 거래 했던 것, 오레곤 산골짜기 길을 운전하던 엄마가 트럭을 추월하겠다며 1차선 추월차로에서 추월을 하며 가속을 하는데 정면에서 오는 차가 점점 빨라지며 우리에게 다가와 모두가 아찔했던 것. 그렇게 도착한 종착지 시애틀에서는 충돌이 발생했다.
우리 집은 아빠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감당했고 유학을 시켜줄 만큼의 부잣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왜인지 나를 미국에 남겨놓고 가겠다는 의지가 꽤 확고했다. 나는 엄마의 작은 분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엄마를 지지했다. 한국에서 고3 수험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고 지난 1년이 힘들었다기보다는 꽤 즐거웠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엄마의 확고함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 완벽하게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엄마는 한 번씩 한국이 여성들에게 친절한 사회는 아니라고 나에게 얘기를 해왔었다. 직장에서의 유리 천장도, 결혼생활/육아에서 강요되는 여성의 희생도, 왠지 모르게 여성의 지위가 남성의 지위보다 낮게 느껴지는 그런 사회 분위기도. 그래서 엄마는 내가 미국에서 교육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과학고를 다닐 만큼 뛰어난 스타일도 아닌데 유학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고. 이 말은 아직도 가끔 한 번씩 생각날 정도로 내게 상처로 남아있다. 사실이기도 했고 당시 나는 외고 전형을 4번을 떨어진 한심한 인간이었으니. 어느 하루는 이 주제로 또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가 결국 깜깜한 밤, 아빠가 호텔 방을 뛰쳐나갔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니 나는 텍사스에 남아 고등학교를 마치기로 했다. 1년 동안 아빠 밑에 딸려있던 비자(J-2)를 가지고 있던 나는 비자를 학생비자(F-1)로 바꿔야 했다. J는 공립학교를 다닐 수 있지만 F는 F-2가 아닌 이상 공립학교를 다닐 수 없다. 그래서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12학년에 전학을 가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온 부잣집 아이들이 많은 사립학교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끼리 워낙 끈끈했고 더군다나 영어도 아직 서툴렀던 내가 그들 사이에 낄 틈이란 없었다. 이 시기를 내 삶에서 흑역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딱히 뭐다 할만한 기억이 남아있지도 않다.
운전을 할 수 없고 혼자 살기에는 미성년자라 엄마는 텍사스에 있을 때 본인이 공부하면서 만난 분 집에 나를 홈스테이 시키기로 했다. 내가 다니던 사립학교의 고등학생들은 본인들이 운전하는 벤츠, 렉서스를 기본으로 타고 다녔지만 나는 호스트 패밀리의 10년이 넘은 캠리에 아침마다 학교로 실려 다녔다. 그때는 그게 좀 부끄럽기도 했다.
호스트 패밀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에 비해 나는 어렸을 때 달란트 잔치가 좋아서, 중딩 때 좋아하는 오빠가 있었던 친구가 그 오빠를 보겠다며 다닌 교회를 따라다녔던 때 말고는 종교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딱히 종교 생활을 하려는 생각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톨릭 학교를 다니게 되었던 나는, 호스트 패밀리 손에 이끌려 매 주말 성당을 나가야 했다.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성당을 빠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고 그들은 나를 진정한 기독교인의 길로 인도하길 원했다. 나는 하기 싫었던 성경공부를 해야 했으며 결국엔 세례를 받아 엘리자베스라는 세례명을 갖게 되었다. 얼마나 그 과정이 싫었는지 세례 전날 밤 엄지발톱에 레모네이드 가루가 든 무거운 통이 떨어져 피멍이 들고 발톱이 나가는 바람에 세례가 끝난 후 신부님과 함께 찍은 사진의 한쪽 발에는 쪼리가 신겨져 있다.
국교는 없다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헌법조차 기독교를 베이스로 쓰였다고 믿는 미국사는 입장으로 성경은 꼭 읽어보길 원해 집에 가지고도 있고, 처음 유럽 여행이었던 스페인에서의 가우디가 신에게 바치는 건축물들과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아름다운 성당들에 큰 감동을 받아 도대체 기독교와 그 역사에 대해는 궁금한 점이 많지만 매일같이 강요되는 종교에 대한 믿음은 내 안에 거부감을 강하게 심어놓았다.
다만 피아노를 좋아했던 나는 학교에서 진행되는 미사의 피아노 반주자로 활동했고 조용히 공부만 하다가 졸업을 했다. 졸업할 때 대학가서는 즐겁게 살라며 티 팬티 몇 장을 선물로 줬던 친구들 얼굴이 생각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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