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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ug 15. 2019

습작

여든번째

“원래 연락이 잘 안 되는 부류의 인간이에요” 남자가 턱을 괴고 말했다.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휴대폰을 잘 안 보거든요. 친구들이 ‘그럴 거면 휴대폰 같은 거 왜 들고 다니냐’고 할 정도로요”


“그러게요. 왜 들고 다니는 거에요?” 여자가 물었다.


“……일이라는 것도 있고, 여러모로 휴대폰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 시대니까요”  


“하하, 알아요. 그냥 대답이 궁금해서. 생각해보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네요”


“괜찮아요”


“아무튼” 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제가 보낸 메시지에 하루 종일 답변이 없었다는 거에, 나름의 해명을 하신 거네요. 악의는 없었다고”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남자는 시큰둥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대답할 거에요? 당신이 악의가 없었다고 한들 나는 기분이 나빠 못 견디겠다고. 사과하라고”


“사과하죠, 뭐”


“의외네요”


“솔직히 이해는 안 되지만” 남자는 젖혔던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말을 이었다. “이해를 해야만 사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게 정말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해요”


“좋아요. 그런데 왜 이해가 안 되느냐고 물으면 실례인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전 단지…… 연인이든, 부부든, 어떤 인간관계든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에요. 이 사람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야 다양하겠죠. 정신적 소통이든, 육체적 대화든…… 그런데 그게 고작 ‘내가 보낸 카톡에 얼마나 빨리 답장하느냐’ ‘얼마나 자주 이모티콘을 쓰느냐’ 따위로 결정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그럼 좀 웃기지 않나요?”


“왜요, 그게 그 사람한테는 아주 중요한 요소일수도 있죠. 뭐,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여자는 자못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문제는, 카톡 일찍 읽고, 최대한 빠르게 답장하고, 이모티콘 많이 쓰고, 하트 뿅뿅 많이 하고…… 이딴 건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거에요. 의무적으로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일종의 서류작업처럼. 카톡이 오면 서류 결재하듯이 그럴듯한 대답이나 해주면 되는 거죠. 손가락이나 몇 번 움직여서요. 그런 걸로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확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게 말해서 아주 순수한 사람인 거겠죠? 나쁘게 말하면 좀 바보인거고”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얘기네요. 하기야 카톡 빨리 답장하는 건 직장상사한테도 하라면 하는 거니까” 여자는 카페 정문으로 하나둘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말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죠. 그렇게 별 것 아닌 일이라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좀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연락이 늦어서 상처라고 하면”


“글쎄요…… 그건 좀 다른 얘기인 거 같은데……” 남자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왜요?”


“그건 어디까지나 의무적인 거잖아요. 진심에서 우러나 하는 행동도 아니고. 심지어 그걸 잘 한다고 해서 알아주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내내 잘하다가 한 번 못하면 욕을 먹죠. 늘 해오던 노력을 잠깐 안 한 것 가지고도 실망을 한다고요. 전 그런 건 싫어요. 그걸 수습한다고 하던 일에 지장이 가는 것도 싫고…… 솔직히 말하면, 전 차라리 침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몇 인치짜리 모니터 화면 안에서가 아니라”


“그럼 요는 그거네요” 그사이 여자는 찻잔을 모두 비웠다. “상대방이랑 자고는 싶지만 메시지 주고받는 건 귀찮고, 하던 일에 일절 지장이 가는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집에서 멀리 나가고 싶지도 않은데, 또 이걸 이해해줄 결혼상대가 필요하다는 거죠?”


“네, 정확해요”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악의가 없는 건 확실히 알겠어요. 그런데” 여자는 곁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접어 넣으며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다른 감정도 없는 것 같네요.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흥미나, 사랑 같은 거요”


“방금은 무슨 말씀이시죠?”


“적어도 우리 같은 결혼정보회사에, 고객님이 찾는 분은 없다는 말이죠. 아마도 다른 곳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소셜데이팅앱…… 아니, 국제결혼소개소는 어떠신가요?”


여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걸어 카페에서 빠져나갔다.


<빈도와 강도>, 2019. 8



<등대>


 "수현"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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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t.ly/2MeKV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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