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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Sep 04. 2019

습작

아흔네번째

 “또 시들었어” 나는 반쯤 누렇게 뜬 꽃잎을 어루만졌다. “대체 몇 번째야? 물도 꼬박꼬박 줬는데”


 “물을 너무 많이 줘서 그런 거 아냐?” 언니가 말했다.


 “아니야. 매일 아침마다 반의 반 컵씩 주면 된다고 했어. 꽃집 아주머니가 한 말이야”


 “꽃집 아주머니라고 다 아는 건 아닌데, 뭘” 언니는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우리는 꽃 같은 거 못 키운다니까. 이런데서 안 시드는 꽃이 어디 있겠어? 애초에 이런 반지하에서 뭘 키운다는 거 자체가 넌센스야”


 “……”


 “화분 이리줘. 부스러기 더 떨어지기 전에 비닐로 싸서 버리게”


 “싫어” 나는 화분을 가로막고 섰다. “안 버릴 거야. 시들면 시들어가는 채로 그냥 놔둘래”


 “그게 무슨 소리야? 시든 꽃을 집에 왜 놔둬?”


 “언니는 드라이플라워라는 것도 몰라?”


 “그거야 보기 좋을 때 이야기지. 이건 이파리들이 아래로 축 처졌잖아. 끝부분은 아예 새카매졌고. 보기만 해도 힘이 빠지는구만!”


 언니는 왼쪽으로 날 밀어냈다. 그러고 나서 양 손으로 화분을 들어 현관 신발장 뒤꼍에 가져다놨다. 화분은 그 자리에 만 하루쯤 있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꽃이며 자그마한 화초를 집안에 들여놓았다. 


 “이 화초는 집안 공기를 정화해준대”


 “뭐야, 얼마 줬는데?” 언니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만 원밖에 안 줬어”


 “돈도 많네, 돈도 많아…… 용돈 그렇게 쓸 거면 차라리 나한테 줘. 얼마 안 가서 다 죽을 텐데. 시간낭비에 돈낭비라고”


 “이번엔 괜찮거든? 꽃집 아주머니가 얘는 햇빛도 물도 많이 필요 없다고 그랬어”


 “세상에 그런 식물이 어딨어? 고사리나 이끼도 아니고…… 그거 일일이 치우는 것도 일이라니까. 너 한 번이라도 니가 산 화분 내다놓은 적 있어?”


 “언니는 너무 함부로 버려. 잘 키우다 보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일부러 밉게 말했다. “언젠가 나도 갖다버리겠네? 언니 생각대로 안 자란다고, 제대로 안 컸다고 말이야…… 아!”


 나는 말하다말고 눈앞이 번쩍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고개가 반쯤 돌아가 있었다. 왼쪽 뺨이 얼얼해오기 시작해서 곧 따갑기까지 했다. 따귀를 맞은 건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언니일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못하는 말이 없어, 진짜!” 언니는 마주선 채 씩씩거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들고 있는 오른쪽 손바닥이 벌개져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이 살래? 엄마 없이 자란 거 티내? 학교 공부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뭐 잘 한 게 있다고 이딴 걸 사오고 지랄이야. ‘만 원밖에 안 줬다’고? 너, 나가서 천 원짜리 한 푼이라도 니 손으로 벌어온 적 있어? 내가 이 나이에 너 먹여 살리겠다고, 밤낮없이 뼈 빠지게 일하면서 벌어온 돈이야. 니가 정신이 있는 애야? 도대체가, 그딴 데 돈을 써놓고 한다는 말이 뭐라고? 내가 널 갖다버릴 거라고? 야, 내가 널 갖다버릴 거면 이렇게 살겠어? 나 좋다는 사람 붙잡아서 벌써 시집이나 갔겠지!”


 “……나도 싫어” 내가 말했다. 


 “……뭐라고?” 언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도 이렇게 사는 거 싫다고……” 나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그렁그렁해진 시야 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상황에 울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의지보다 먼저 반응한 몸이 제멋대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냥 가버리지 그랬어? 그때 결혼하자고 했던 회사원 아저씨한테 가버렸으면 됐잖아. 언니한테 아파트도 해준다고 했다며…… 그런데 왜 이런데서 나랑 같이 살아? 내가 언니 인생을 구질구질하게 만드는 거잖아. 언니는 나 때문에 학교도 못가고, 연애도 못해. 그래서 집에 돌아왔을 때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라고 놔둔 거야. 낮에는 잠만 자니깐, 그렇게라도 안 하면 꽃 같은 거 볼일도 없을 것 같아서……”


 “……”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창백했다. 


 “아, 진짜. 왜 이렇게 세게 때린 거야. 내일 학교는 어떻게 가라고……” 나는 주저앉아 빨갛게 부은 뺨을 어루만졌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바닥장판에 뚝뚝 떨어졌다.


 “……미안해. 미진아. 언니가 잘못했어. 아무리 화가 나도 손찌검은 하는 게 아닌데……” 언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떨렸다. “……나도 아빠랑 별 반 다를 바 없나봐”


 아니야, 그래도 아빠보다는 언니가 몇 십 배는 더 좋아, 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언니는 쫓아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방문 너머로 “나 나가서 담배 좀 피고 올게. 먼저 자” 나직이 말했다.


 밤새 울면서 잠을 설쳤다. 언니는 해가 뜨고 학교에 갈 시간이 돼서도 집에 오지 않았다. 반항심에 아침까지 거르고 등교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야자를 마치고 돌아온 집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하긴 지금은 일하러 나갔을 시간이니까. 돌아올 때까지 할 말이라도 생각해놓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찰나 집안에 평소와 사뭇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화장실 옆쪽 누렇게 뜬 벽에 꽃이 피어 있었다. 초록색 줄기에 같은 색 잎이 주렁주렁 달렸고, 새빨갛고 탐스러운 꽃송이가 여러 송이나 피어 아름다웠다.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대보니 살짝 시큼하고 인공적인 냄새가 났다. 아크릴 물감 냄새였다. 


 내가 좀 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엄마가 살아있고 아빠의 사업이 망하기 전에, 언니는 미술학원에 다녔다. 매일 학교가 마치자마자 달려가서 몇 시간씩 수업을 듣고 돌아왔다.


 언니의 옷에선 거의 항상 물감 냄새가 났다. 유화를 그리고 온 날이면 유달리 냄새가 심했다. 아크릴 물감을 쓴 날은 한결 덜했다. 간혹 냄새가 없으면 종일 스케치를 했거나 수채화를 그렸다는 뜻이었다.


 언니가 미대입시를 준비할 쯤 해서 가세가 기울었다. 하필이면 그 때였다. 상황판단도 안될 만큼 어렸던 나와는 다르게, 그때도 언니는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래서 졸지에 학원을 관두고 일을 찾아 나섰다. 집에 있던 멀쩡한 붓이며 물감은 죄다 내다버렸다. 눈에 띄면 괴롭기만 하다는 게 이유였다. 


 나와 단 둘이 남겨진 뒤부턴 더 많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와도 눈을 붙이기 무섭게 일어나야했다. 과로로 몇 번씩 졸도한 뒤로는 그렇게 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러면서 내게는 일하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공부를 해 먼 나중에 갚으라는 식이었다. 


 언니는 하루하루 초췌해졌다. 몇 주 전에는 담배 때문인지 꽤 심한 폐병을 앓기도 했다. 새롭게 시작한 일은 밤늦게 나가 해 뜰 무렵에 돌아와야 했다. 언니의 얼굴을 보는 건 더 어려워졌다. 가끔 보는 모습마저도 화장이 워낙 짙어서, 이제는 원래 얼굴이 어떤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런 마당에 대뜸 벽지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다. 세 들어 사는 집에 이게 무슨 짓이람. 그런데 분명 붓이고 물감이고 다 갖다버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 때 버리지 않고 숨겨놓은 붓이라도 따로 있었던 걸까.


 그즈음 방 안쪽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방문을 아주 천천히 열어 젖혔다. 언니는 전등을 모두 꺼놓고 잠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생얼이었다.


 ‘확실히 화장을 잘 한다니까’


 나는 속으로 쿡 웃고는 돌아 나왔다. 부엌은 한참동안 청소를 안 해 어수선했다. 모서리에 놓인 쓰레기통이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불룩해져 있었다. 원래라면 언니가 해놓았을 일이었다.


 ‘분명 얼마 전에 비웠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엌 찬장을 열어 여분의 쓰레기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꽉 찬 쓰레기통의 뚜껑을 집어 들었다. 이윽고 나는 쓰레기통이 빨리 차버린 이유며 언니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까지 모두 알 수 있었다.


 버려진 도구들은 하나같이 빨간색 또는 초록색 물감으로 젖어 있었다. 언니가 화장에 쓰는 온갖 크기의 브러시며 아이라이너들이었다. 쓰레기통 안쪽에서부터 아크릴 물감 냄새가 잔뜩 배어나왔다.


 문득 고개를 들자, 노란 벽면에 빨간 꽃송이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피어있을 것처럼. 나는 살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본적이 없다.           



<화양연화>, 2019. 9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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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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