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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08. 2020

습작

백예순두번째


 어느덧 그 때의 길섶에는 하얗고 빨간 꽃잎들이 흐드러졌다. 전날 밤 흩뿌렸던 빗방울들이 공기 중으로 풀내음을 실어 나르고, 천천히 뒤덮어오는 저녁구름 뒤로 석양인지 등대인지모를 불빛이 고개를 가눴다. 듬성듬성 작은 나무가 심어진 숲은 북녘으로 조금 치우쳤는데, 다 자랐는데도 줄기며 가지가 고만고만한 것이 꼭 어린 시절의 내 모습 같아 웃음이 났다. 


 나는 차츰 그늘져가는 길 구석을 따라 거닐면서, 지금쯤 잠들어있을 그녀의 삶을 추억해보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녀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내가 태어날 당시에 이미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물론 겉보기로는(하기야 나는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오십대 초반, 할머니보단 조금 나이 있는 어머니 정도로 보였지만, 장남인 나의 탄생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녀에게도 할머니가 있었다. 할아버지도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도 전부 있었다. 다만 그녀가 딸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든든한 맏언니이자 큰 누나로서 지나보냈다. 학생이었던 적도 없었다. 대신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막내를 씻기고 밥 챙겨 먹인 다음 학교까지 데려다 놨고, 그때부터 습관이 됐는지 나중의 아들딸과 손주들에게도 똑같이 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는 ‘백 살이 다 되도록 내 이름도 제대로 못 쓴다’며 부끄러워했다.


 그토록 억척스럽게 살아온 그녀의 인생에도 취미가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아주 잠깐 동안만, 툭하면 할머니를 찾는 아이들이 잠들어있을 무렵에 마당 너머 풀밭으로 나가 걸었다. 알고 보니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꽃들의 씨앗을 뿌리면서 돌아 다녔다. 


 그녀에게 그런 취미가 생긴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 번은 여섯 살이었던 내가 낮잠을 자다 퍼뜩 깨버려서, 집에 없던 할머니를 찾겠답시고 마당이며 주위 논밭들을 쏘아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집에서 자던 손자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면서 시골집이 난리가 났는데, 다행히도 얼마 가지 못하고 집 근처 어느 무성한 수풀 속에서 잠든 채로 발견된 것이다. 


 잠이 오면 집으로 왔어야지,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주위에 다 풀밖에 없어서 방향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은 나 몰래 바깥에 나간 할머니가 미워서, 골탕 좀 먹어보라고 생애 최초의 가출을 했던 거였는데. 그런 줄 꿈에도 몰랐을 그녀가 줄곧 풀밭에 씨앗을 뿌리고 다닌 것은 다름 아닌 그 때부터였다. 


 “이라믄 잘 찾아오것지, 눈에 잘 띄는 빨간 색이니까는”


 하지만 엄마가 날 도시에 있는 학교로 데려가서, 기숙사가 있는 중고등학교와 번듯한 간판의 대학에 보낼 때까지, 나는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아가지 못했다. 엄마는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 별 수 없이 이혼했다고, 또 그래서 아빠의 엄마인 그녀를 찾아갈 순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녀가 있고 그녀가 심어놓은 꽃밭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자랐다. 어쩌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고의로 차단해놓아야 했다. 


 하여튼, 나는 십수 년이 지난 뒤에야 그녀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키가 많이 컸고, 운동을 해서 덩치도 커졌지만, 여전히 길을 몰라 갈팡질팡했다. 언제부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러는 동안 내가 헤집고 다녔던 풀밭 근처에는 못 보던 포장도로가 한 줄 나있었다.


 ‘이건 못 보던 길인데…… 이쪽으로 가면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 나올까? 정말 이 길이 맞나?’


 그렇게 또 한 번 길을 잃으려던 찰나, 나는 돌연 현기증이 치밀어 올라 풀숲 위로 쓰러져 누웠다. 아, 길 왼쪽 머언 들녘에서 빨갛게, 아주 새빨갛게 스며들어오는 그녀의 꽃들이라니. 아…….     


<꽃, 길>, 2020. 5                              




<집으로 가는 길>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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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inette'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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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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