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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n 12. 2020

습작

백예순세번째

 “……그걸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요” 나는  지나친 겸양과 오만함 사이에 있는, 아주 좁고 희미한 틈새를 찾으며 말했다. “애초에 저는,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영감이라는 게……”


 “아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필요이상으로 호들갑을 떨며 대꾸했다. “어떻게 영감도 없이 글을 쓰나요? 말도 안 돼…… 아, 작가님의 영업비밀 같은 건가요? 평소에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영감을 얻는가 하는 것이, 아무래도 글로 먹고 사는 입장에서는……”


 그녀의 너스레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사이 나는 말을 끊을 타이밍도 찾지 못했거니와, 발언권이 생긴들 마땅히 내놓을만한 답변도 없었으므로 잠자고 앉아 듣기만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적당히 듣는 체를 하면서, 똑같은 내용을 다른 단어와 문장으로 이어가고 있는 그녀의 안색이며 표정의 변화 같은 것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참 다양한 주제에 대해 쓰시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또 많이 노력해서 쓰려고 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글을 쓸 때마다 제일 힘든 점이 그거거든요. 적당한 소재랑 그 소재에 붙일만한 플롯, 시나리오 같은 것들이 저로서는 잘……”


 그녀는 질문을 던지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눈을 맞추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혼자서 몇 분이고 비슷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신나있는 모양에, 나는 나와 꼭 닮은 밀랍인형을 의자에 앉혀놓더라도 한두 시간은 별 탈 없이 흘러가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라고 타인의 대화방식에 무어라 참견하거나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태도로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오랫동안 함께 있기가 힘이 들었다. 


 하기야 그녀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고, 도톰한 정도는 아니어도 보기 좋을 만큼 살이 붙어있는 세련된 여자였다. 자칫 창백해 보일 정도로 새하얀 살결에 요리조리 제스처를 취하는 손길이 우아했으며, 유독 볼륨이 도드라지는 회색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또 무게감이 있는 넓적다리에 비해 종아리가 무척 가늘었는데, 어느 정도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비율이 좋아보였다. 거기다 화장은 한 술 더 떠서, 일자눈썹에 살짝 붉은 기운이 도는 틴트와 차분한 색의 아이섀도우를 칠한 모습이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만 죄다 골라서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의 방에 크고 작은 화장용 브러시가 백 개는 있고, 주말마다 욕실 세면대 앞에 서서 브러시 세척에 열을 올리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상상돼 싱긋 웃었다.


 “그래서…… 아, 왜 웃고 그러세요? 저는 진지하게 묻는 건데!” 내 표정을 감지한 그녀가 발끈하며 말했다.


 “아, 알아요. 진지하다는 거요”


 “정말요”


 “정말이죠, 그럼” 나는 한껏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실제로 그녀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그녀의 외관으로 미뤄보건대, 평소에는 그만큼 주도적으로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식사 자리, 술 자리, 친구와의 만남, 남녀가 반씩 섞인 학과 행사나 동아리 모임까지, 그녀의 마음에 들고자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이 꼭 두세 명쯤은 있을 것 같았다. 주로 질문을 던지는 입장보다는 받는 입장이었을 것이고, 거기에 별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내놓아도 세상 대단한 말이라도 한듯 필요이상의 반응을 하는 사람도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추레한 차림의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질문으로 풀어 몇 분이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부터가, 어떤 면에선 상당부분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가 얼마나 그런 진지한 대화에 굶주려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남들보다 좀 더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멍청한 사람들에게 멍청한 질문을 들으면서, 정작 본인은 원치도 않는 진부한 대화를 해야 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비극이었다. 그녀는 이렇게나 진지한 자세로 글을 대하는데도, 그녀의 외모는 그녀가 사랑해마지않는 ‘글’들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만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꾸미기 좋아하고 시선끌기를 즐기는 그녀의 천성에도 책임이 있겠지 만은.


 “그래서, 정말 해줄 말씀이 없으세요? 정말 아무 말도 안 해주실 건가요?” 그녀는 그쯤해서 거의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셔도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말할 순 없어요. 저는 영감으로 뭘 쓰는 타입이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특별한 소재를 가져다 특별한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평범한 소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고민하는 편이라고 해야하나요……” 이렇게 말하던 도중에, 나는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동그랗게 치켜 뜬 눈동자, 동공, 희미한 망막, 그 위로 떨어지는 속눈썹의 그림자가 새삼스러웠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내게 스스로 감지하지 못할 만큼의 오만함이 있고, 그런 무의식적인 오만함을 가능케 하는 모종의 탤런트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그녀는 그 짧은 만남을 빌어 필사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과연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고. 이런 내게도 당신과 같은 진지함이 허락되겠느냐고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하는 것일까?


 “……저는, 너무 아름답기만 해선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고심 끝에 운을 뗐다.


 “방금 그 말씀은” 그녀는 내 말에 감응하듯 다소곳한 자세를 해보였다. 


 “실례가 아니면……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스물한 살이요”


 “젊으시네요”


 “작가님도 젊으시잖아요?”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요. 따지고 보면 우리 둘 다 젊죠” 나는 고개와 함께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맞아요”


 “그러니까요. 지금부터 그렇게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요? 글쓰기를 그렇게 좋아하시면…… 앞으로도 계속 쓰실 것 아닌가요?”


 “물론이죠”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깨지고 산산조각이 나는 것들이 있을 거에요. 정말 모든 게 끝장났고, 엉망진창으로 아작났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반드시 올 거라고요”


 “반드시요” 그녀는 두 눈을 반짝거렸다. 언뜻 봤을 땐 조금쯤 울먹거리는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이 부분에 관해선 절 믿으세요. 오직 산산조각이 난 사람들만이 낼 수 있는 빛들이 있어요. 깨지지 않은 거울에 빛을 비추면 오롯이 같은 방향으로 되돌아오지만, 깨진 유리조각에는 작지만 온갖 색깔의 빛들이 반사돼 나와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난 채 드러나는 다양한 면들…… 크고 작은 조각들을 빛의 테두리가 쉴 새 없이 움직여 감싸고, 흰색과 검은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전에 없던 스펙트럼이 삐져나오는 거에요. 이리저리 뒤척이다 쫓겨 나오는 담홍색, 날카로운 능선을 따라 흐르는 은회색 줄기와 광선이 가시처럼 눈을 찌른다고요. 그러면……”


 “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서 깨지고 나면. 그럼 단순한 빛도 여러 가지 색으로 바꿀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이시죠?”


 “네, 뭐…… 비슷한 것 같아요” 나는 멋쩍게 관자놀이를 긁었다. 별로 간지럽지도 않았는데. 무슨 요지의 말을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듣다보니까 어쩐지 ‘고생 좀 더 하고 와라’는 느낌인데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게 고생 아닐까요. 또 그런 것들이 삶에 깊이를 더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때 당시에는 절망적이지만요”


 “참 별 것도 아닌 걸로 엄청 많은 걸 말하시네요. 저랑 한 대화도 글로 쓰실 건가요?” 그녀는 테이블에 있던 수첩을 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글쎄요. 그렇게 재미있는 소재 같진 않은데……”


 “평범한 것도 특별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신다면서요?”


 “그거야 마음이 내킬 때 얘기죠”


 “그럼 내키면 써주세요”


 “아, 싫어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난반사>, 2020. 6                 





<유리조각>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김예지'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그림이 걸린 방에는 방향제가 필요없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작업도 후원하고, 당신만의 공간에 멋진 그림도 한 점 걸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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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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