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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Oct 14. 2018

추워지는 날이면 후쿠오카에 가야한다 (1)​

뜻밖의 여정

 우리나라는 계절이 유독 빠르게 변한다. 특히 시월에 접어들면, 따가울 정도로 햇발이 내리쬈던 팔구월은 온데간데없고, 가을을 가로질러 겨울에 다다르는 터널의 공사를 마친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출구에서 찬바람을 한 줄기씩 수입해오는 것이다. 다른 나라야 오래 살아본 적이 없으니 사정을 모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라곤 나와 날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맘때쯤 꼭 알레르기성 비염과 씨름한다는 것 정도겠다.


시월. 서울의 하늘


 별다른 계기는 없었다. 대구에 있는 친구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서, 그렇게 방구석에서 찌질 거리고 있을 바에야 같이 바람이나 쐬러 가자, 고 제안한 것이 전부였다. '일정이고 숙소예약이고 다 내가 하겠으니 너는 몸만 와라, 여러모로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 는 말. 개인적으로 이 친구에게 신세를 진 게 있고, 당장은 글이든 강연이든 계획된 일정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얘길 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그랬다. 그래서 바로 다음 주에 떠나는 것으로 돼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국내로 얘길 하다가, 이왕 갈 거 물 건너 바깥으로 가자는 이야기로 흐르더니 마침내 후쿠오카로 결정이 났다. 후쿠오카가 어디지, 하고 지도를 켜보니 제주도와 거의 비슷한 위도에 있었다. 항공권도 무척 저렴했고, 뭣보다 대구공항에서 가까운 것이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나는 인천공항, 친구는 대구공항에서 각자 출발해 후쿠오카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본은 전에 두 번 가봤다. 오키나와에 한 번, 오사카에 한 번. 후쿠오카는 이 두 곳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비행시간으로 보나 실제 거리로 보나 제주도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떠난다는 기분보다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떠나는 날 아침이 돼서야 짐을 쌌다. 뭐, 짐이라고 해봤자 옷가지 몇 개와 노트북, 읽고 있던 책 정도가 들어있는 메신저백 뿐이었다.


공항버스의 창밖. 인천공항이 가까워진다


 짐을 싸고 집을 나섰다. 마침 먹던 약이 다 떨어졌기에 잠깐 병원에 들렀다가 공항버스에 탔다. 서울대입구역에서 출발한 육천삼번 공항버스는 두 시간여를 달렸다. 인천국제공항 제일여객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비행기 출발까지 세 시간이 남은 시각이었다. 시간여유가 없이 도착해 비행기를 놓칠 뻔한 적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나는 탑승수속을 마치고 세 시간의 여유를 편안히 즐기기로 했다.



 내가 가방에 넣고 간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였다. 그 전까지 도스토옙스키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책을 많이 읽는 편도 아니거니와, 대표작인 <죄와 벌>은 너무 두꺼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교양을 위해 집어든 것이 이 책이다. 이백 장 내외의 비교적 짧은 작품이고, 제목도 요즘식으로 하면 '히키코모리의 일기' 쯤 되니 꽤 재밌었다. 나는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책의 반절을 읽었다.


제주항공을 이용했다. 수화물을 빼니 편도가 삼만 원도 안 나왔다


 후쿠오카공항은 꽤 컸다. 여기서 '꽤 크다'고 표현한 것은, 출발한 곳이 인천공항이기 때문이다. 곳곳에 붙은 일본어와, 일본말을 하는 일본 사람들, 그리고 심심찮게 보이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보고 있으려니 친구가 도착했다. 추석 때 이미 봤던 얼굴이라 크게 반갑진 않았다. 삼박사일에 무슨 캐리어까지 들고 오냐, 쪼매난 가방 하나 들고 온 니가 이상한거야, 같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FANTASTIC FUKUOKA


 공항을 나서보니 후쿠오카는 저녁이 돼있었다. 첫날은 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숙소에 체크인부터하기로 했다. 우리는 하카타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하카타역은 후쿠오카에서 가장 번화한 역 중 하나다. 친구가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가 근처에 있었다.


하카타역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일본의 버스는 뒷문으로 타고 앞문으로 내렸다. 또, 탈 때가 아니라 내릴 때 돈을 냈다. 나는 이게 완전히 생소한 일처럼 느껴져서, 내가 일본에서 버스를 탄 적이 없었나? 스스로 물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요금 체계도 특이했다. 탈 때 뽑은 번호표를 기준으로, 이동거리에 따라 버스 맨 앞쪽의 요금표를 보고 돈을 내는 방식이었다.


 이십 분 정도 지나 하카타역에 도착했다. 하카타. 어디서 들어봤다 했더니, 홍대 근처에 '하카타분코'라는 라멘집이 있었다. 내가 살던 고시원과 가깝기도 했고, 맛도 괜찮아서 자주 찾아가곤 했는데. 얼마 전 홍대 근처에 간 김에 들렀더니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예전에도 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거진 다섯 배는 길어진 것 같았다. 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줄이 무진장 길어진 라멘집과, 오래 기다릴 시간도 에너지도 없어진 나 사이의 간극을 세아려 봤다.


번화한 하카타역


 하카타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데 사십 분이 걸렸다. 제대로 가면 이십 분일 것을 좀 헤메느라 사십 분이 됐다. 우리 둘 다 저녁도 못 먹고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어놓고 침대에 늘어졌다가, 빨리 밥이나 먹자싶어 바깥으로 나왔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 찾는데 좀 헤맸다


 내가 마침 라멘을 떠올렸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첫 끼니는 라멘으로 결정됐다. 후쿠오카는 특히 라멘으로 유명한 곳이랬다. 다만 이치란은 미국에도 있는 프렌차이즈고, 뭔가 특별한 걸 찾다가 '다루마'라는 이름의 가게를 찾아갔다. 허접한 영어와 바디랭귀지였지만 주문에는 지장 없었다.


'다루마'의 돈코츠라멘. 좀 짜다


 국물이 아주 진한 돈코츠라멘이었다. 여권 크기의 차슈가 셋, 넷, 아무튼 고기가 엄청 많았다. 진한만큼 육향에는 장난이 없어서, 누린내까지 여과 없이 났다.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면 나는 그런 냄새. 취향은 아니었지만 무난하게 잘 먹었다. 면과 차슈, 국물에 온통 간이 쎄서 물을 많이 마셨다. 친구는 어느새 라멘을 다 비우고 내 차슈까지 하나 뺏어 먹었다.


일본의 편의점. 압도적인 종류와 볼륨을 자랑한다


 라멘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숙소 건물에 꽤 큰 세븐일레븐이 붙어있었다. 일본의 편의점은 갈 때마다 새롭다. 편의점 구경을 한 시간 가까이 했다. 나는 우롱차 큰 것 하나와 여러 간식거리들을, 친구는 큰 사이즈 산토리 위스키 한 병을 사들고 숙소에 올라갔다.



 모든 여행의 첫날이 그렇듯이, 우리는 마음껏 들뜬 상태로 즐겁게 먹고 마셨다. 내가 먹고 있던 약 때문에 친구만 술을 마셨다. 워낙 주량이 센 녀석이라 큰 사이즈 위스키를 반병이나 비우고 쓰러졌다. 난 새벽 두 시가 돼서 잠들었다. 블라인드 없는 창밖으로 건물의 불빛들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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