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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Oct 15. 2018

추워지는 날이면 후쿠오카에 가야한다 (2)

후쿠오카 해변의 노을


 "……결론적으로 그건 겉멋이라는 거지, 안 그렇나?“


 "그래, 니 말이 다 맞다“


 나는 맥아리없이 대답했다. 잠깐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열어놓은 베란다에서 밤 공기가 스며들어왔다. 지층에서 일본어로 왁자지껄, 질서 없이 떠드는 소리도 함께 들어왔다.


 "여기서 니가 한 얘기 중에 틀렸거나, 비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얘기는 하나도 없어……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난 처음부터 논쟁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틀린 건 명백하게 내 쪽이니까“


"그래서?“


 친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일부러 익살맞은 표정과 함께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네 말에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거지. 내가 장르문학…… 아니. 다시 말하지만, 이런 구분을 왜 하는 지도 난 모르겠어. 순문학이랑 장르문학이라는 거, 애초에 순문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거만하다고 난 생각한단 말야. 어느 누가 문학의 순수성에 명확한 기준을 정할 수 있냐고? 그런 건 국립국어원도 못해, 아니! 하면 안 되는 거지! 그건 폭력이니까! 판타지와 SF가 장르이듯이, 이 시대에 뒤떨어진 문학도 하나의 장르에 불과하고…… 나는 더 고결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글을 쓰는 게 아냐. 오히려 추악하지. 안 그렇냐? 바뀐 시대, 매체, 플랫폼에 적응하지 못하고 머저리같이 길고 지루한 글이나 써대면서, 사람들이 관심은 많이 가져줬으면 하는, 생떼나 어리광처럼 너무 추악한 사고구조로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데 더 추악한 게 뭔지 아냐?“


 "……“


 친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흐렸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흐린 아침이었다. 친구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선 '야, 벌써 오후 한 시다!'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난 건성으로, 뭐야, 큰일 났네, 하면서 휴대폰을 봤는데 오전 열시 반이었다. 친구는 내가 너한테 두 시간 반의 인생을 선물로 줬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 대 때리고 말았다.


숙소 근처에 강이 있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위해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많은 직장인들이 '마츠야'라는 곳에서 아침을 해결한다기에 가봤다. 통유리 너머로 가게를 들여다보니 왠지 일본의 김밥천국 같았다. 우리는 뭔가 특별한 아침식사를 필요로 했고, 결국 근처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돈카츠를 먹기로 결론 내렸다.


'카츠테이'의 입구


 하카타역 인근 상가에 있는 '카츠테이'는 내가 찾아냈다. 블로그에는 잘 없고 구글지도에만 뜨던 가게였다. 평점이 사 점을 훌쩍 넘기에 믿고 갔더니 마침 점심을 때우러온 직장인들이 많았다. 옷차림으로 보건대 가게에 한국인은 우리 둘뿐인 것 같았다. 난 가장 스탠다드한 로스카츠 정식을 시켰고, 친구는 가츠동에 모듬튀김을 추가로 주문했다.


'카츠테이'의 로스카츠


 끼니를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돌아다니다보면 '최소한 이 정도로 맛있는 걸 먹지 않으면 안 돼' 같은 보상심리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츠테이에서의 아침 겸 점심식사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주문이 꽤 밀렸는지 음식도 늦게 나왔지만, 튀김옷 속에는 이 모든 불만을 덮어 꺼트릴 만큼 두껍고 부드러운 고기가 있었다.


각성효과가 미미했던 인스턴트 커피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밥 한 끼 먹겠다고 너무 돌아다니기도 했고, 전날 늦게잔 것 치고 꽤 일찍 일어나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인스턴트커피를 사갔지만 부질없었다. 친구와 나는 삼십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낮잠에 빠져들었다. 먼저 일어난 것은 나였다.


후쿠오카타워로 가는 버스


 우리가 후쿠오카타워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오후 네 시쯤이었다. 이십 분 동안 달린 버스는 중간에 엄청나게 긴 다리를 하나 건넜다. 그때 창밖으로 화물 컨테이너들과 조선소처럼 보이는 거대한 산업무더기들이 보였다. 난 문득 고양이섬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뒤졌다. 일본에 고양이섬은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아이노시마 섬'이 후쿠오카 근방에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일정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친구에게 같이 가겠느냐 물었더니, 고양이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며 사실은 좀 피곤하기 때문에 별로 가고 싶지 않다, 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세 번째 날에는 따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후쿠오카타워가 보였다. 우리는 후쿠오카타워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저게 후쿠오카타워가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다. 결과적으로는 정확한 추론이었다. 가는 길에는 공원과 후쿠오카시립박물관이 있었다. 친구의 권유로 박물관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다.


저게 후쿠오카타워가 아니면 문제가 있다


 후쿠오카타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바다가 코앞이라서 그런지 오는 길에 바람이 많았다. 입장료는 일 인 당 육백사십 엔. 꽤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상공 백이십삼미터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꼭대기층 전망대에서 후쿠오카 시내와 바다를 번갈아 내려보다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후쿠오카


 타워 앞쪽으로 난 해변에는 인파가 꽤 있었다. 파도는 크지 않았고, 멀리 보이는 항구와 산 너머로 노을이 짙게 뻗어왔다. 친구는 연신 사진을 찍어대더니, 일본에 오길 정말 잘했어, 아름다운 걸 보니 야망이 더 커지는 기분인 걸, 했다.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확실히 그럴 만큼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후쿠오카 해변의 노을


 해변에서 타워로 돌아가는 길에 디저트 카페가 있었다. 마침 당이 떨어진 참이었다. 난 초코바나나맛 크레이프를 사먹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숙소 방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버스 창밖에는 불빛 말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는 넘어갔다.


디저트 카페에서 먹은 초코바나나 크레이프


 숙소 근처에 도착하니 마침 저녁때가 됐다.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건 좀 소모적인 것 같다, 그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밖에서 식사를 하고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아무래도 스시를 먹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친구는 동의했다. 구글지도는 또 다시 사고를 쳤다.


'우에다'의 입구


 우에다(うえ田, 이렇게 읽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라는 이름의 스시전문점이었다. 손짓발짓을 동원해 스시 코스를 주문했다. 소름이 끼치는 맛이었다. 친구는 살면서 먹어본 스시 중에 가장 맛있다면서, 수십 번 감탄사를 뱉었다. 코스가 끝난 뒤에는 마구로아카미(참치 붉은살), 다이(도미), 사바(고등어)를 추가로 주문해 먹었다. 엄청났다.


마구로아카미 (참치의 붉은살) 스시


 가격도 엄청났다. 세트를 포함해 먹은 건 열 피스 정도였던 것 같은데…… 사천 엔이 넘게 나왔다. 나보다 세 개 더 먹었던 친구한테는 육천칠백 엔이 나왔다. 솔직히 말해 돈이 아까운 건 아니었다. 이런 걸 먹고도 돈 때문에 움츠러드는 내가 싫었을 뿐이다.


편의점에 들러 산 간식들


 편의점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친구는 어제 먹다 남긴 위스키 반병을 비우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장르문학, 그러니까 판타지 소설이야말로 지금 방황하는 내가 가야할 길이었다. 자신 역시 순문학에 대한 향수가 있지만,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 매월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벌어보면 세상이 바뀐다, 서있는 곳의 높이가 달라진다, 시야가 달라진다, 사람들이 소설에서 원하는 건 대리만족과 자기위안이며, 그 요소를 잘 긁어주는 텍스트만이 살아남고 있다, 이쪽으로 넘어온다고 결정하기만 하면 출판사와 바로 연결을 시켜주겠다, 네 결정만 있으면 된다…… 뭐 그런 종류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사실 실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난 친구의 제안 앞에서 어떻게 고마움과 거절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 지를 고민했다. 친구는 진심이었다. 적어도, '너처럼 글을 좋아하고 열심히 쓰는 놈은 이렇게 비루하게 살면 안 돼, 더 많은 돈으로 인정받아야 해'라는 진정성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약간의 겸허함도 남기지 않았다. 난 어리광쟁이고, 철없는 자식이고, 실패에 허우적대느라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게 됐고, 이젠 죽는 날까지 쓰고 싶은 글을 쓰다 죽겠다는 추악한 아집밖에 남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름모를 죽순 모양 과자. 친구는 술안주로 먹었다


 "누군가 이뤄낸 걸 아주 우습게 보고, 돈을 쫓아 그 바닥으로 기어들어가는 거지. 그래놓고 실패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니가 장르문학을 우습게 본다는 얘긴 아니고“


 친구가 말을 보탰다. 위스키를 마신 건 친구 뿐이었지만, 더 취한 것 같은 사람은 내 쪽이었다.


 "그냥 나는 지금의 추악함으로 족하는 거야…… 사람들이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고, 그냥 그걸로 내 미약한 존재의미를 확인하고 있지. 그건 명백한 자위고, 겉멋에 지나지 않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럼에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뿐이라고……“


 "……“


 친구는 말없이 베란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남은 위스키를 몽땅 들이마시고는, 내가 봤을 때 넌 안 죽어, 못 죽어, 하며 드러누웠다. 난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쓰러졌지만, 친구가 코 고는 소리에 몇 번이나 깼다. 새벽이 느리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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