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11월 23일.
그러나 나는 차 뒷좌석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면제를 세알이나 더 삼켰는데도 심장박동이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못자는 건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약을 먹긴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운전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대로 어디론가 드라이브나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바깥은 새벽을 넘어 해가 뜨려고 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역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 들러 라면 한 그릇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서연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그대로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워 두세 시간쯤 잤다.
정오쯤 됐을까? 뒤늦게 잠에서 깬 서연이와 비로소 대화를 시작했다. 새벽에 어딜 다녀왔느냐,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다, 너무 피곤해서 대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는 얘기가 이어졌다. 그런 말들을 다 듣고 나서, 나는 나도 내 발작 증세에 놀랐으며 조만간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어제 내 얘기에 대한 답변을 좀 해줄래? 우리가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냐는 거 말이야…….” 하고 운을 뗐다.
“……나는 있지.” 서연이는 시선을 먼 쪽으로 잠깐 뺐다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앞으로 계속 같이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내 생각에는 한 달 정도 떨어져 살면서 여기에 대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뭐라고?” 나는 당황했다. 내 질문의 의도는, 물론 우리가 같이 사는 일 자체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내게 있어 서연이와 함께 사는 것은 상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들어 서로 함께 사는 것의 의미가 흐릿해졌고, 여기에 대해 재고한 다음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보자는 게 요지였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질문하면 안 됐던 걸까?
처음엔 그렇게 내 질문을 잘못 이해했다거나, 혹은 어제 일로 속이 상해서 다그치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서연이가 말하는 태도나 표정으로 볼 때는, ‘당분간 따로 살고 싶다’는 말 자체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꺼내놓는 말 같았다.
“나도 정말 인정하기 싫었는데, 너랑 같이 있으면서 내가 어떤 것에 대해 행복해하는지를 좀 깨닫게 됐어. 물론 나는 그림 그리는 게 좋긴 해. 그렇지만 정말 예술에 내 모든 걸 걸고 뭘 이뤄내겠다는 식으로 살고 싶진 않아.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면서까지 그림을 그리긴 싫어. 내 생각에 넌 글 쓰는 걸 정말 좋아하고, 언젠가는 꼭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느껴. 진심으로 그렇게 믿어. 그런데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나는 평범한 사람이거든. 평범한 사람한테는 평범한 행복이 필요해.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너처럼 생각을 하기는 해. 내 친구들, 지금 결혼하거나 회사를 다닌 친구들 보면, 뭐하러 저렇게 열심히 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대체 뭐 때문에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인간관계에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월급을 받고, 돈을 모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 근데 나는,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보니 나도 그런 것에서 행복을 느껴. 내가 원하는 행복은 너랑 달라. 돈을 조금씩 모아서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가끔씩 모아놓은 돈으로 여행도 떠나고, 맛있는 거 먹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즐기고…… 얼마 전에 친구들이랑 다녀온 스쿠버다이빙처럼 말이야. 이런 것들이 난 좋아. 근데 너 앞에선, 하지 말아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 내가 누워서 휴대폰 하는 거에 대해서도 넌 싫은 소리를 하고. 내가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얼마 전에는 친구들이랑 대화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들었어. 서연아, 너 왜 이렇게 사과를 많이 해? 내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자꾸 사과를 한다는 거야. 너랑 있으면서 난 자꾸 미안한 사람이 됐어. 왜 내가 쉬는 것까지 네 눈치를 봐야하는지. 나는 솔직히 스쿠버다이빙을 잘 하는 편이야. 내가 잘 하는 걸 하면서, 사람들한테 칭찬받고 관심 받는 게 좋아. 그런데 너랑 같이 살면서 그런 걸 잃어버렸어. 내가 뭘 원하는 지, 어떤 것에 행복해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 나다운 건지를 잃어버렸어. 그래서 나는 너랑 따로 살아야할 것 같아. 한 달 정도. 따로 있다가 생각이 정리가 되면 돌아와서 얘기를 하자.”
“…….”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서연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최근에 내가 느꼈던 우리 사이의 위화감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떤 원인으로 상황이 악화돼왔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어떤 것에서 무신경했는지, 또 어떤 부분을 손보아 나가야할지가 마구 떠올랐다. 그러나 당장은 그런 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서연이가 내린 결론에 의하면, 나는 하루아침에 서연이와 떨어져 한 달간의 고립을 참아 견뎌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 다다랐을 때는, 앞으로 영영 나와 함께 있지 않겠다는 절망적 결론에 도달할지도 몰랐다. 나는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서연이를 떠나보내선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일단은 방금 들은 것들에 대해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어제도 얘기했지만 최근에 우리가 대화할 기회가 영 없었잖아. 외부 활동도 있었고. 더구나 너는 전시 준비로 바빴고, 나는 독서모임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 그러다보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점점 더 쌓여서 문제가 곪았다고 생각해. 나는…… 내가 소홀했다고 생각해. 최근 몇 달 동안 나 스스로도 너무 무기력했어.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잘 살아나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으니까. 거기에 이렇다 할 결론도 못 내고, 우울한 게 더 심해져서 거의 온종일 책만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지. 나 자신을 지탱하기에도 벅차다보니 너한테는 거의 신경을 못 썼던 것 같아. 물론 나도 무언가 잘못돼가는 걸 느끼긴 했지만, 일단은 네가 옆에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압박을 견디다 못해 너한테도 괜한 스트레스를 주고, 사소한 것 때문에 크게 싸우는 일도 많았지. 너는 많이 노력했는데, 나는 그만큼 많이 노력하지 못했어.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말한 평범한 행복은, 너 뿐 아니라 나도 원하는 거야. 너도 말했지만, 나도 내가 뭐 하나 쓰긴 할 것 같아. 네 말대로 그렇게 위대하거나 대단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쓰고 있기는 하니까. 그런데, 그걸 위해서 나도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고 싶진 않아. 네가 고흐처럼 죽고 싶지 않듯이, 나도 도스토옙스키나 피츠제럴드처럼 살다갈 생각은 없어. 애초에 그렇게 쓸 수 있는지는 둘 째 치고 말이야…… 나도 평범한 행복을 원해. 그리고 내가 그 평범한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너 덕분이야. 너와 같이 살면서 꿈이 생겼어. 가정을 이루고, 집을 마련하고, 가끔씩 여행가고, 좋아하는 취미 하고, 나야말로 그런 걸 꿈꿨어. 그러니까 우리의 목적은 같아. 내가 아무리 대단한 글을 써낼 수 있다고 한들, 지금 네가 없고 너와 같이 행복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겠어? 네가 좋아하는 것들, 행복을 느끼는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무심하게 굴어왔던 것 정말 미안해. 나는, 나는 단지…… 뭐가 문제인지를 몰랐던 거야. 나는 이제야 겨우 알았고, 이제 뭔가 해결할 수 있도록 방법을 함께 찾아보고 싶어. 같이 평범한 행복을 좇을 수 있게끔…… 그러니까, 가지마. 안 가도 돼. 여기서 같이 나랑 고민하면 안 될까? 좀 더 같이 있으면서 생각해보면 안 될까?”
“아니, 난…… 나는 잘 모르겠어.” 서연이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그럼 일주일, 일주일만 같이 있으면서 생각해. 그래도 괜찮잖아?”
“일주일.”
“응. 일주일.” 나는 희망에 가득 찬 투로 이야기했다. “네가 간다면, 나는 막을 수 없어.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다만 나는, 나한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 내게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
서연이는 다소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지못해 동의한 셈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정말 자신이 있었으니까. 뭐가 문제인지 일단 깨닫고 나면, 그걸 고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연이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일주일 안에라도 못할 것 없었다. 나는 서연이를 정말로 사랑하니까. 정말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