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11월 24일.
(이 날 내 일기 마지막에는 ‘인생 최악의 하루’라고 쓰여 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서연이가 없었다. 서연이는 어제도 일찍 잠들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수면제의 힘을 빌려 겨우 잠들었는데, 오전 일찍 일어났는데도 인기척이 없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기야 서연이는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는 경우도 있고, 내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먼저 끼니를 해결하러 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디로 갔는지 확인은 해야겠다싶어 전화를 걸었다. 오랜 신호 끝에 서연이가 전화를 받았다. “아, 나 중고거래 때문에 잠깐 나왔어.” 라는 대답을 남기고 통화가 끊겼다. 다른 사람들 출근할 시간에 웬 중고거래인가 싶었지만, 최근 중고거래앱(당근마켓)에 푹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주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서 집에 돌아온 서연이가, “아, 나 오늘 할 일을 정했어. 난 자전거를 타고 양평에 다녀올 거야”라고 한 말엔 적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늘은 나랑 같이 하루 보내는 거 아니었어? 어제 이야기했잖아. 오늘은 별 일정 없으니까 같이 시간 보내면서 대화 나눠보자고.”
“나도 어제 얘기했잖아. 나한테는 이런 게 중요해.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운동을 못해서 더 힘들었던 것 같거든. 자전거 안 탄 지도 꽤 됐으니까 오늘은 자전거를 탈래.”
“나도 네가 자전거 타는 것 자체는 상관없어. 그런데 양평까지 간다고?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
“글쎄. 왔다 갔다 하면 오후 여덟시에는 오지 않을까?”
“오후 여덟시? 그럼 나랑 이야기는 언제 해? 시간은 언제 같이 보내고?”
“갔다 와서 얘기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서연이는 아주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자전거 타고 오면 당연히 피곤할 거 아냐. 와서 씻으면 바로 잠들 거고. 그럼 지난 몇 주 동안이랑 똑같이 돼버리잖아.”
“안 그럼 되잖아?”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양평이라고 했나?”
“아냐, 나 혼자 갈래.” 서연이가 딱 잘라 대답했다. “혼자 타고 싶어.”
“……왜?” 나는 갈수록 의아했다.
“그냥. 혼자 타고 싶어. 보내줘”
“이건, 이건 너무 노골적이잖아. 나를 피한다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져. 나랑 같이 있기 싫어?”
“오늘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싶어.”
“뭐? 아니…….” 나는 서연이가 내 말을 정말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대놓고 모르는 체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한동안 이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연이는 ‘빨리 출발해야 빨리 온다. 지금 보내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나는 ‘왜 꼭 자전거를 타겠다는 거냐. 어제 그런 대화를 했는데 오늘 하루쯤은 안타도 되는 것 아니냐’며 맞섰다. 나로서는 우리의 관계가 그토록 심각한 상황에 놓였는데도 ‘반드시 자전거를 타야한다’고 버티는 서연이의 태도가 낯설기도 했거니와, 어딘지 모르게 싸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 직감이 불현 듯 찾아왔다.
서연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테이블에 놓인 서연이의 휴대폰을 들어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잠금이 해지되지 않았다. 잘못 입력했나 싶어 두 번, 세 번 반복해 쳐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오래전 지문을 등록해놨던 게 생각나서 손가락을 가져다 댔지만 ‘등록되지 않은 지문’이라는 경고 텍스트가 떴다. 나는, 비로소 무언가 잘못됐다는 확신에 다다랐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돼있었다. 어쩌면 영영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살았던 지난 2년간, 나와 서연이는 휴대폰은 물론 기타 전자기기들의 비밀번호를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숨길 것도 없었고 눈에 불을 켜고 서로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집이나 달리는 차에서 서로의 휴대폰으로 음악을 트는 일이 많았다. 알아두어서 나쁠 게 없었던 것이다. 서연이가 누구와 어떤 연락을 하는지는 사생활의 영역이니까, 비밀번호를 안다고 해서 함부로 보는 일도 없었다. 결국 나는 2년 만에 처음으로,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않은가’하는 의도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다. 잘못된 행동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대화를 계속 지속하는 것보다는 더 확실하게 속내를 알 수 있는 방법 같았다. 그런데, 시작부터 실패한 것이다. 나는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해?” 마침 자리에 되돌아오던 서연이가, 다소 이상한 눈초리로 내게물었다.
“너, 휴대폰 비밀번호 바꿨어?”
“어, 바꿨는데. 왜?”
“내 지문도 등록돼 있었잖아. 그건 왜 삭제했어?”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내 말이 감정적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진심으로 이유가 알고 싶었다. 내가 한 오해가 터무니없어질만한, 내가 그저 신경과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그런 이유가 서연이의 입으로부터 나오길 바랐다.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서연이는 멋쩍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솔직하게 말해줘. 난 정말 이유를 알고 싶은 거야.”
“이유?”
“보안상의 이유로 비밀번호를 바꿀 순 있어. 그런데 내 지문까지 지워버렸다는 건.” 나는 이 충격적인 말을 어떻게 꺼내놓으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나한테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거잖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있지.”
“그게 뭔데? 나 몰래 연락하는 누군가가 있어?”
“…….”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서연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상의 수긍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있는 거야?”
“응. 연락하고 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 서연이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마치 ‘나는 고양이를 좋아해’하고 일상적인 사실을 털어놓는 것처럼,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인 듯이 되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나는 생각보다 금방 대답했다. 다른 이성과 연락을 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사적인 대화도 할 수 있고, 때로는 호감 섞인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을 내게 숨겨야했다는 것,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남자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솔직히 호감이 느껴진다고. 아니면 지금의 관계에 뭔가 부족한 게 있는 것 같다고. 미리 얘기해줬으면 됐잖아.”
“그래, 그러네. 근데 그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 얘길 안 했었나봐.”
“연락한지 얼마나 됐는데?”
“이 주? 보름 정도 됐지.”
“…….” 나는 그 순간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을 감추려 안간힘을 썼다. 이 주, 이 주 동안 서연이가 다른 사람과 그런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단 말인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서연이보다 이런 문제가 벌어질 때까지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을 표현해봐야 좋을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지나간 일 보다는 지금 상황에 집중해야한다고 판단해 대화로 돌아왔다. “그래. 그럼 지금 자전거 타러 간다고 하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야? 이 주 동안 연락해왔다는?”
“그런 거 아니야. 자전거만 타고 돌아올 거야.” 서연이가 어처구나가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빨리 보내주기나 해줘. 집에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 늦어질수록 돌아오는 시간도 늦어져.”
나는 더 이상 서연이를 막을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러 가겠다는 의지가 이상하리만큼 강했다. 붙잡아둬 봤자 제대로 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긴 실랑이 끝에 서연이는 자전거를 타러 집을 나섰다. 소파에 자전거 헬멧을 두고 나갔기에, 뒤따라 나가서 건네주고 왔다. 그래,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나도 서연이에게 할 말을 생각해두자. 그런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서연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수원에 사는 서연이네 가족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여자친구 부모님을 만나는 게 영 부담이 없진 않았지만, 자기 가족에게 나를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얘기가 나로선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수원으로 내려갔다. 그러다보니 서연이의 언니와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고양이까지. 잘은 몰라도 정말 좋은 분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만나 뵈었다. 가끔씩은 가족끼리 가는 여행에 내가 동행하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처음에는 뭔가 이상한 조합 같기도 했고, 여행에 드는 경비를 모두 부담해주시는 통에 지나치게 신세를 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가보니 내게도 너무나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부모도 친척도 없이, 사실상 고아처럼 살아온 지가 오래 됐다. 그럴듯한 가족여행을 떠나본 기억도 거의 없다. 초등학생 시절 엄마와 함께 다녀온 당일치기 경주 여행이 유일했다. 그런 내게 가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족끼리는 서로 어떤 말들을 주고 받는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서연이가 가진 여러 가지 모습들이, 어떤 성장환경으로부터 말미암았는지도 조금쯤 알 수 있었다.
그런 여행을 불과 이달 초일에 다녀온 참이었다. 서연이와, 서연이의 언니, 그리고 어머니와 동행해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서연이와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게 한 달도 안 된 시점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와 떨어져 살고 싶으며 다른 사람과도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일주일 전에는 내 생일이었다. 나는 누군가 내 생일을 챙겨준 경험도 거의 없고, 스스로도 생일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기대가 없는 상태였다. 사실 기대를 하지 않는 쪽이 덜 상처받는다는 것을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이젠 생일날을 평범하게 지나보내는 것이 습관이 돼있다. 서연이는 그런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선물을 해줬다. 마침 책장 앞쪽에 서연이에게 선물 받은 향수, 그리고 게임패드가 있었다. 나는 그 선물들을 받으면서, 미안하다고, 난 이런 선물을 받는 게 너무 어색해서 얼마나 고마운지를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고, 거의 울먹거리면서 말한 기억이 났다. 서연이는 말없이 날 껴안았다. 어쩌면 내가 나쁘지 않게 살아왔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속 깊은 곳에서의 행복을 느꼈다. 아,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일주일 전의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이런 징후들―가족여행에의 동행, 생일선물―을 핑계 삼아서, 서연이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며 안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하기야 그런 일들과 연인으로서의 마음이 떠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함께 산다는 이유로, 이제 거의 가족과 다름없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최근 몇 달간 서연이의 마음에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이 크다. 아니, 거의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서연이에게 무어라 탓할만한 상황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느꼈다.
내가 처한 입장을 생각해보고 나서,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봤다. 서연이가 한 일에 대해 화낼 필요는 없었다. 큰 상처를 받긴 했지만, 그건 그동안의 서연이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겨우 이런 것에 열을 올릴만할 처지는 못 된다. 단지 서연이가 돌아오면 피곤해할 게 분명한데, 복잡하게 대화를 길게 늘어놓는 것보다는 편지를 써서 주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라면 글 쓰는 것 밖에 없으니까. 여기에 얼마 전에 사뒀던 깜짝 선물―이틀 뒤면 우리가 사귄지 정확히 이 년이 되는 날짜였다―을 함께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기념일에 줄 생각이었지만. 하루 이틀쯤 미리 준다고 해서 잘못될 건 없으니까.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편지를 썼다. 그동안 글씨체 다듬는 연습을 한 보람이 있었는지, 전보다 또박또박한 글씨로 편지지 세 장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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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이에게.
네게 손편지를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정말이지 나는 2년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돼 있구나 하는 걸 느껴. 그 때의 나는 무엇이든(특히 좋은 것에는 더욱) 네게 이야기 해주고픈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글씨를 연습하게 된것도 너한테 좀 더 예쁜 글씨로 편지 써주고픈게 첫 번째 이유였는데 말이야. 난 이제 글씨도 잘 못쓰고 편지도 쓰지않는 나쁜 남자친구가 됐구나. 어떻게 나이를 먹을수록 표현 하나에 너무 많은 부담이 생기는 모양이야. 변치않는 마음이라도 다르게 보이는 이상 바뀌었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마음인데도. 안다고 착각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망쳐왔는지, 이제는 하나하나 셀 수도 없어서 괴롭고 속상해.
내가 너한테 화가 잔뜩 났을 때, 넌 귀여운 그림과 함께 손편지를 써서 남겨주곤 했지.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이고 노력이었는지 나는 알면서도 표현할 생각을 못했어. 너는 이런 내게서 배웠는데, 나는 갈수록 독선적이어서 꽃 한 송이 사들고 올 줄 모르게 됐어. 이런 나를 마주하고 인정하는 것이 이토록 힘든데, 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받아들여야 했던 네 심정은 어땠을지.
서연아. 나는 단지 사과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게 아니야. 사과라는 건, 어떤 상처에 대해서는 시간과 행동으로 밖에 전할수 없으니까. 그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하루 종일 생각해봤지만 영 부질없는 고민이었다는 걸 알아. 원인을 알아낸다 하더라도 내겐 타임머신이 없으니까. 있다하더라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나는 이런 내 모습이, 나 역시 실망스러워. 나는 몇 달 전부터 내가 되길 원하는 모습, 네가 사랑했던 내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지. 나의 최악의 습관이 여기에 있어. 스스로조차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멈추고 싶지 않으면 다른 모든 걸 무시해버려. 이런 바보같은 행동과 말들이 온전히 너의 이해심에 기대어 작동하고 있었던 거지. 너무도, 너무도 소중한 네 마음을 나는 너무 멍청한 방식으로 소모해버렸던 거야….
그동안 왜 몰랐을까? 사랑한다는 말에 서로가 주저하게 되고, 주말을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날들이 많아지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죽어라 싸웠고, 좋은 영화 좋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줄어들었잖아. 모든 것이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는데도. 그래서 너무 늦게 이런 편지나마 쓰고 있으니. 우리 사이가, 아니,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게 예전처럼 대해주지 않는 네 모습이 슬프지만, 그런 사랑과 관심을 받을 자격이며 가치들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내가 더 슬프고 미워. 이렇게 된 마당에 어떻게 널 탓할 수 있겠어.
나는 원칙적인 사람이 아니야.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다른 바보같은 사람들과 달리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도 갖고 있지 않아. 그렇지만 네 앞에서는, 특히 너와 싸울 때에는 꼭 그런 체를 하며 너를 상처주고 자존감을 깎아내렸지. 바깥에서 사과를 많이 하고 있었더라는 네 말을 듣고 머리가 아찔했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팠어. 나는 가장 오래 함께 있고 또 그만큼 소중한 사람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던거야.
용서해달라고, 앞으로 달라질테니 믿어달라고 말하지 않으려해. 하지만 난 너로부터 사랑받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었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돈을 잘 벌지도, 운전을 잘 하지도 못했지만, 늘 네게 웃어주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해야했던 그 때의 내가 그리워. 적어도 그 때까지만, 내가 나다워질 순간까지만 나를 확인해줄 수 없겠니. 평범하게 너와 함께 늙고, 별 것도 아닌 일로도 울고 웃는 삶을 살고 싶어. 그리고 그건 네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꿈이야. 너와 함께 꿈꾸고 싶어. 잠들고 싶고 깨고 싶어. 부디 내 곁에 있어줄 수 없겠니?
2020. 11. 24 현빈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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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편지를 쓰다가보니 벌써 시간이 오후 여덟시를 지났다. 서연이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여덟시 정도에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 때문에 늦게 출발했으니 어쩔 수 없지. 늦게 출발하면 그만큼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카톡 정도는 확인해주면 좋으련만. 자전거를 타고 있으니 영 쉽지 않겠지.
그러나 서연이는 오후 열시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카톡은 아예 읽지도 않았다. 뭔가 늦어질 만한 이유가 생겼나? 끝끝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오래 이어졌지만 받지 않았다. 못 봤을까 싶어 몇 번을 다시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충격이었던 건, 그 중 몇 번은 신호가 가는 도중에 끊기고 ‘연락을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라는 안내말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전화가 오는 걸 확인했지만, 전원버튼을 눌러 일부러 끊어버릴 때 나오는 것이었다. 그 때 알았다. 서연이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다. 함께 있는 동안은 남자친구의 연락을 받을 수 없는 사람. 어쩌면 몰래 연락하고 있었다는 그 남자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내 전화를 받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약속한 시간보다 이렇게 늦을 이유도 없었다. 부정할 수 없으리만큼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죽고 싶었다.
서연이는 자정이 다 돼서야 들어왔다. 전화를 스무 번이나 걸었지만 끝까지 받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꿇어앉은 채 울고 있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연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런 날 내려다보면서 소파 끝자락에 앉았다. 멀찍이. 나와는 더 이상 가까워져선 안 된다는 듯이.
“……왜 이렇게…… 늦었어?” 나는 죽어가는 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가…… 그렇게 연락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래, 늦어서 미안해.” 서연이는 아주 단호하게,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듯 뚜렷하게 말했다. “오다가 여기저기 들르다보니 늦었어.”
“……만난 거지? 그, 연락한다는 사람…….”
“……그래. 그 친구도 만났지. 밥도 먹었고.” 서연이는 이제 거리낄 게 없는 것처럼 말해왔다. 그리고 서연이가 연락하고 있다는 그 남자에 대해, 나는 피상적인 사실 몇 가지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은 이미 그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 남자도 진지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다고.
처음 만난 것은 이 주 전, 대학생 시절 취미로 즐기던 스쿠버다이빙을 아는 사람 몇 명과 함께 다녀오겠다고 말한 날이었다. 함께 가는 인원 중에는 남자도 있었고, 거기서 연락처를 교환해 몰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연이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가는지 물어봤었고,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가게 두었다. 서연이가 그 정도로 분별없는 사람도 아니고. 나야 독서모임 준비로 바쁘니까 별 문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쪽 무리의 남자들이 ‘굳이’ 남자친구 있는 여자와 같이 떠나려한다는 것이 이해는 안 됐지만.
역시 스쿠버다이빙을 즐긴다는 그 남자는 공무원이었다. 대화하는 투나 성격을 보건대 화목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이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부모님도 없고, 화목하기는커녕 불화와 학대에 시달린 데다,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는 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알아? 너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거?” 내가 물었다.
“알지.” 서연이가 대답했다.
“……같이 산다는 것도?”
“알아.”
“아는데, 그렇게 했단 말이야?”
“그렇지, 뭐.” 서연이는 또 다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대답 자체보다도, 그렇게 차갑게 이야기하는 태도가 내게는 더욱 큰 고통을 줬다. 아, 그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자친구가 있든 말든. 같이 살든 말든. 젊은 남녀가 만나서 서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연락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 네 남자친구가 가지지 못한 걸 나는 전부 줄 수 있어’라는 태도로 접근해왔을 그 남자에게 어쩔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그 사람과 사귈 거야?”
“아직은 잘 모르겠어. 만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그럼, 나랑은 헤어질 거야?”
“……그래야하지 않을까?”
그래야하지 않을까. 서연이는 정확히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그게 헤어지자는 말이냐고 되물었다. 서연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당장 내일이라도 짐을 싸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정말 많은 것들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가서 어쩔 거냐고, 그 사람과 같이 살 속셈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서연이는 웃으면서, 걔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 그러고 싶어도 못해, 하고 대답했다. 또 다시 눈이 그렁그렁해오는 것을 느꼈다.
“서연아.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어서, 나는 책상에서 챙겨두었던 선물과 편지를 가져와 건넸다. “읽어봐. 밑에 있는 건 선물이야”
“……지금 읽어?”
“응. 읽을 수 있으면.”
서연이는 편지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나자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왜 이런 편지를 미리 써주지 않았냐면서. 계속 기다렸는데, 이젠 너무 늦었다면서.
“미안, 미안해. 내가…… 너한테 너무 소홀했어. 나는 네게 따질 자격이 없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나는……” 나는 최대한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나는 너한테 화가 나지 않았어. 진심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다만, 나는 말하고 싶었어. 나도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너로부터 사랑받던 시기의 내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 그러니까 다시, 다시 네 남자친구로 받아들여줄래?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을래……?”
“……이건 뭐야……?” 서연이는 울면서, 편지와 함께 건넨 선물상자를 열어보았다. “……지갑이네. 나 지갑 사려고 했던 거 어떻게 알고…….”
“……지갑이 많이 낡았잖아. 늘 새로 사주고 싶었어.”
“……고마워. 잘 쓸게. 색도 너무 예쁘다.” 서연이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그게 기뻤다. 그 선물에 대한 고마움과, 나나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은 별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현실이 뼈 속에 사무쳐 아파왔다.
편지를 읽고도, 선물을 받고도, 아무리 애원하고 울어도 서연이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나와 헤어지고, 따로 살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들었다. 나는 조금만 더 대화하자고 했다가, ‘거 봐, 너는 뭐든지 네 맘대로만 하려고 해’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 함께 누웠다. 그저 “내일 아침은 같이 먹을 수 있어?”라고 물었다. 들릴 듯 말 듯 “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을 위안삼아 수면제를 두 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