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11월 25일.
서연이는 아침 일찍 깬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면제 기운이 좀처럼 깨지 않았고(독세핀. 전에 잘 먹지 않던 성분의 수면제였다), 서연이 혼자 밥을 먹고 나올 즈음 뒤따라 나갔다.
우리는 한 때 자주 갔던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씩을 사서 나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돼 카페 안에서는 대화할 수 없었고, 요 앞에 있는 하천가를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서연이와 나란히 걸으면서, 나는 어제 했던 이야기를 한결 조리있고 침착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서연이도 피곤했던 어제보다 더 활발하게 의견을 얘기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산책하는 게 좋아. 산책을 하고 나면 하루를 정말로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거든. 이렇게 걸으면서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고, 발에 땅이 닿는 걸 느끼고…….”
“……너랑 산책하러 좀 더 자주 나올 걸 그랬어.”
“그래.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투명한 개울 표면이 햇빛을 마구잡이로 튕겨내 눈이 부셨다. 하얀색 새끼 왜가리가 목을 죽 뻗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 다리 밑 그늘진 곳에서 깃털을 손질하는 오리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우리의 대화는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좀 더 이어졌는데, 다행히 전날 밤보다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내가 널 소홀히 하고, 그런 멍청한 좆밥들에게 노출시킨 책임이 크다고 봐. 나는.”
“좆밥이라니! 하하…….” 서연이는 진심으로 크게 웃었다. “걔가 좀 좆밥 같이 생기긴 했지. 근데 난 그런 거 좋아해. 좆밥 같이 생긴 거.”
“그리고 공무원이라며. 그야 나보다 돈은 착실하게 벌겠지만…… 확실히 재미는 없을 걸. 나는 재밌지 못하면 굶어죽는 직업이니까.”
“그거야 그렇겠지.”
“난 네가 그 사람과 더 연락을 해도 상관없어. 물론 아예 상관이 없지는 않지. 괴로워. 그렇지만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이 있어. 내가 더 멋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자신이. 어쩌면 너는 내가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이미, 내 마음을 다 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자존심 때문에 놓치고 죽어라 후회한 경험이 있어. 거기서 배웠어. 인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그런 기회 앞에서,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를 알았어.”
“…….”
“심지어 나는 네가 그 사람과 잤다고 해도 상관없어. 전에 말했듯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 나도 너 만나기 전엔 그렇게 떳떳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고…… 뭔 상관이야? 어차피 내가 훨씬 잘 할 텐데. 원하면 가서 확인해봐. 그리고 현재 남자친구의 소중함을 느끼고 돌아와도 나쁘지 않지……” 나는 서연이가 크게 웃는 걸 보고 기뻤다. 힘들지 않은 체 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이런 게 서연이가 좋아했던 ‘내 방식’이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잖아. 나는 네가 어떤 욕구 때문에 그 사람과 연락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있었고, 거기서 결핍을 느꼈기 때문에, 때마침 다가온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거라 생각해. 그런데 그건 있지, 잘못된 접근이야. 적어도 내가 볼 때는. 나로부터 느낀 결핍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채운다는 거. 그건 서로에게도 좋지 않아. 내게 부족한 게 있었다면, 그걸 내게 이야기해줬다면 좋았을 거야.”
“……내가 얘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서연이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넌 나름대로 전달을 하려고 노력했을 거라 생각해. 단지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그 말을 받아들일만한 상황이 못 됐던 거야. 뭐가 잘못됐는지도 몰랐고.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야.”
“미안해. 난 더 이상 네 말에 신뢰가 안 가. 기대도 안 되고.”
“…….”
“나는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 했어. 지난 이 년 동안, 내 인생의 최우선순위는 너였어. 넌 지금 내가 일시적으로, 충동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자꾸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 그렇게 생각되는 데에도 질렸어. 난 네 생각처럼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야. 난 이제 너한테 쏟을만한 에너지가 없어. 그 뿐이야. 그리고 내 삶을 위해서, 내 인생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위해서 시간을 가지고 싶어. 그 결정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나도 몰라. 네가 내 인생에서 얼마만큼의 의미인지도, 지금 연락하고 있는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그래서 말하는 거야. 한 달 동안 나는 수원에 내려가 있을 거야. 당장 오늘은 친구네 집에 가서 잘 거고.”
“나랑 같이 생각할 수는 없는 거야? 넌 이제 나랑은 아예 연락을 안 하려고 하잖아. 내가 볼 때 이건 생각할 시간이 아니야. 나로부터 정을 떼는 시간이지. 나한테도 최후변론의 기회정도는 줄 수 있잖아. 응? 서연아…….” 나는 다시금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지나보냈던 이 년이, 그 사람과 연락했던 이 주보다는 좀 더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 난 너랑 다시 진심으로 잘 해보고 싶어. 난 정말 너 없이는, 어떻게 살아야할 지도 막막해. 한 번만 다시 생각해줄 수 없어?”
“아냐, 싫어.” 서연이가 말했다. “그리고 난 네가 나한테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힘들어. 부담이 돼. 그것 때문에 널 이해하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이제는 힘에 부쳐. 넌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돼야해. 너 스스로에게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이 돼야해.”
나는 그런 서연이의 태도에 울컥했다. 결국 떠나는 거면서. 그걸 날 위한 일인 양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지난 이 년 동안, 나는 너 덕분에 살았어. 널 만나기 전에 나는 죽은 거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네가 내 삶을 이 년 연장시켜준 거나 다름없어. 너도 그건 알고 있잖아.”
“그건, 맞지.”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갑작스럽지 않았어. 나는 최선을 다 했어.” 서연이는 기계처럼 대꾸했다. 전에 들어본 적 없이 차가운 말투였다. “네가 갑작스럽다고 말하는 것도 싫어. 이런 대화도 이젠 피곤해.”
“……그래. 알았어.” 난 더 이상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괜찮았던 대화흐름도 다시 꼬일 것만 같았다. 이쯤해서 그만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왜 수원에 내려가기 전까지도 나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 어째서 잘 주고 받던 연락도 끊어야 하는지, 내게 이토록 매정하고 차갑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난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날 오후, 서연이는 간단하게 짐을 싸서 서울에 있는 친구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친구들과 어떤 대화를 할까. 나와는 이미 헤어졌다고 할까? 다행히 찾아간다는 친구는 나와 안면이 있었고, 몇 번 만나 즐겁게 대화한 기억도 있었다. 난 지금의 서연이가 어떻게 얘기를 꺼낼지 무서워서, 또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친구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장 먼저 이런 메시지를 보내서 죄송하다, 제가 지난 몇 달 동안 서연이에게 너무 소홀했던 탓에 마음이 달아나버린 것 같다, 그렇지만 저는 서연이와 계속 더 잘해보고 싶고, 앞으로 이만큼이나 모든 걸 쏟아부으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나타날 거라 생각지도 않는다, 저만이 서연이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것들을 서로 주고 받으며 잘 지내보고 싶다, 같은 말을 가능한 정중하게 써서 보냈다. 답장이 왔다. 우리 서로의 니즈가 같으니 잘해보자고. 울지 말고 며칠 동안 할 만한 일이나 좀 찾아보라고.
나로선 친구 분의 그 메시지가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이렇게 절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나는 개울가를 걷던 서연이가, 최근 들어 함께 그리고 쓰는 단편작업이 너무 뜸해졌다고, 그런데 네가 스스로 동기를 못 찾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울적하고 무기력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냈다. 아, 새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죽도록 글을 쓰고 싶어졌다. 당장 뭐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지난해 내가 그토록 열심히 글을 썼던 건, 도스토옙스키나 피츠제럴드 같이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서연이와 더 오랫동안 함께 살고 싶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어서, 서연이와 함께 더 좋아하는 일들을 많이 해보고 싶었다. 주객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젠 모든 게 선명해졌다. 그길로 곧장 숨도 안 쉬고 두 편 분량의 단편을 써냈다. 요 근래 썼던 그 어떤 글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렇게 살다보면, 서연이도 생각을 다시 할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