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6)

11월 26일

by 이묵돌

11월 26일.


오전 여덟시 쯤 눈을 떴지만, 일어나기 싫어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다보니 오후 한 시가 다 되어 일어났다. 아침 식사로는 어제 마트에서 사뒀던 바나나를 하나 먹었다. 처음엔 두 개쯤 먹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를 먹고 나니 아주 생각이 없어져서 관뒀다. 음식을 안 먹다보니 위장이 쪼그라든 것도 같다.


서연이와 사귄지 정확히 이 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 날을 혼자 보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감상적인 것일까? 그러나 이런 것들에 전혀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이 더욱 두렵다.


어디 나갈 일은 없지만 굳이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외출할 수 있는 옷으로 차려입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아무튼 바깥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난 어쩌면 이렇게나 조용한 집 안에서 견딜 용기가 없을 뿐인지도 모른다. 참 웃긴 일이다. 서연이를 만나기 전에는 매일 매일이 이랬었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애써 밖으로 나왔지만 별달리 갈 곳이 없었다. 커피 한 잔을 사서 바로 전날 서연이와 함께 걸었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하늘이 높고 햇빛은 창창한 편이었는데, 나 없이 혼자 이 길을 걸었을 서연이를 떠올려보자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서연이는 고독히 이 길을 걸으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의 이별을 준비해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꽃집에 들러 식물 영양제 한 통과 해바라기 한 송이를 샀다. 그리고 내 책상에 있던 스투키, 서연이가 창가에 놓고 매일 물을 주던 화분에다가 영양제 하나씩을 꽂아 뒀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키우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특히 식물은 손을 댔다 치면 얼마 안가서 시들해지더니 곧 죽기 일쑤였다. 나는 그 영양제로나마 제발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물도 조금 뿌려줬다. 이 집에 있는 무언가와 더 이별했다가는…… 내가 더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항우울제를 챙겨 먹고 보니 약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눈에 띄었다. 정신의학과에 전화를 걸어 다음날 오전 열한 시에 진료를 받기로 했다. 만약 오늘처럼 도피성 수면이 이어진다면, 내일 오전에도 병원에 갈 수 없을지 모른다.


책상에 앉아 글을 조금 썼다. 책도 읽었다. “같은 사람을 존경하는 동시에 뜨겁게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문구가 눈에 밟혔다. 라로슈푸코라는 프랑스 작가가 남긴 말이었는데, 단 한 가지 부분으로나마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연이의 색채와 친화력, 덧없음과 따스함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렇지만 내가 서연이에게 어떤 사람일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시간이 몹시도 가지 않았다. 단편 하나를 다 쓰고 나니 겨우 저녁이 돼 있었다. 게임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내키질 않았다. 지금과 같은 시간을, 고작 게임을 하면서 지나보낸다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좋아하는 책이나 읽자, 싶어서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기 시작했다. 활자가 가득한 종이가 오백 쪽. 그것도 두 권이나 되는 장편 소설이었다. 분량이 만만찮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읽을 만했다. 내용이라면 태어나자마자 양부모를 잃고 백부에게 맡겨진 절름발이 소년 ‘필립’의 일대기인데, 쉬지 않고 이백 쪽 쯤 읽다가도 한숨을 돌려야했다. 잘 읽히는 문체였지만 읽는데 힘이 들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작품을 잘못 골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이입을 너무 심하게 하면 문장 한 줄에도 마음이 아려왔다. 이걸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지 예민함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난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청승 떤다는 표현을 자주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오백 쪽짜리 장편 한 권을 모두 읽고 나니 잘 시간이 다 됐다. 서연이에게는 아직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평소처럼 잘 자라는 말을 하려다가, 되려 싫어할까봐 그만 두고 말았다.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 두 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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