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11월 27일.
오전 열시 반쯤 깼다. 무의식중에 더 자려고 누웠다가, 병원 예약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 좁은 집이 이렇게나 춥고 쓸쓸해질 수 있는지 전에는 몰랐다. 보일러 온도를 높여도 따뜻해지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 추위는 가실지 모르겠으나 쓸쓸함은 도리가 없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다시 따뜻해지리라는 희망이 없을 때 느껴지는 것이다.
별 뜻 없이 거울을 보다가, 얼굴의 윤곽이 유독 도드라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혹시나 해서 체중을 재보니 그사이 삼 킬로그램이 빠져 있었다. 그저 안 먹었다는 것으로 이만큼 빠지다니. 한동안 감자튀김을 너무 많이 먹긴 했다. 서연이는 내가 살이 쪄서, 그래서 매력이 반감된 나머지 더 차갑게 대한 건 아닐까? 초췌하긴 해도 살이 찐 것보단 빠진 쪽이 겉보기엔 나았다. 가족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고 걱정했겠지만. 다행히도 내겐 가족이 없었다. 밥 안 챙겨먹는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이젠 없었다. 나는 그 잔소리를 사랑했는데.
아직 초겨울이라지만 아침 바람이 강해 무지 추웠다. 버스를 타고 십 분을 가면 지하철역이 나왔다. 내가 오 년째 다니고 있는 정신과는 지하철역 출구 쪽에 위치해있었다. 의사선생님은 평소와 비슷하게 약을 처방해주면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표현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어쩌면 글을 쓰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약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니 깜빡 잊고 있던 일정이 생각났다. 일전에 나는 서울시에 사는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에 지원했었는데, 신청자가 별로 없었는지 곧바로 선정돼 상담을 받게 됐다. 그 뒤로는 전담 상담사가 붙어 매주 금요일마다, 총 오 주간의 상담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원래는 대면상담이었던 것이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뒤로는 화상상담으로 바뀌었다. 나는 상담선생님께 지난 일주일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선생님은 전문가답게 내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주셨다. 나로서는 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며 정서 상태 같은 것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시간의 상담이 그저 지루한 통과의례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다행히도 상담은 잘 마무리 됐다. 나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내 생각을 한 번 더 정돈할 수 있었고, 선생님은 상담 말미에 이르러 목이 메셨는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연민을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어떨 땐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쪽이 더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디 서연씨로부터 좋은 소식이 있길 바랄게요.” 라는 말로 상담이 끝났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누구 한 명이 더 바라고 있다, 그 사실이 묘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상담이 끝나고 나서는 줄곧 책을 읽었다. 스페인 속담 중에는 “일 년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은 일이 불과 일 분 사이에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선 이런 것도 어쩐지 남 얘기 같지 않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밤이 됐다. 단편을 쓴 다음 『인간의 굴레에서』를 거의 다 읽어갈 무렵, 서연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용인즉 지금 집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고 싶거나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당장 내일 수원에 일손을 도우러 가야해서, 곧바로 짐을 싸서 내려갈 작정이라는 것이다. 언뜻 이야기하기로는 다음 주 쯤에나 내려간다는 기별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서연이는 몇 번 연락을 하지도 않고 곧바로 집에 왔다. 표정이며 행동거지도 너무나 태연해보였다. 내게는 도저히 이별을 앞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힘들지만 애써 저런 체 하는 것인지, 이제는 정말 단 한 톨의 에너지도 내게는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나는 맨 처음에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은 잘 지냈냐고 물었다. 잘 지냈다고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네 생각이 많이 났는데, 너는 어땠느냐고 물었다. 워낙 바쁘게 지낸 터라 생각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마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했다.
“그 사람과는 여의도를 같이 산책하면서 대화도 했어.” 서연이가 말했다.
“……그래?”
“응. 확실히 너랑은 달라.”
“…….” 나는 짜증이 났다. 날 일부러 화나게 하려고 하는 말일까?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내게는 정말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은 것이다. 서연이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뿐이고, 그런 상황을 지금의 자신에 알맞게 활용할 뿐이었다. “……나는 모르겠어. 만약 네가 말하는 그 사람과 만나면, 나는 몇 분 안 돼서 싸울 거 같아.”
“싸우겠지, 당연히?”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래. 네 말대로 그 사람 화목한 가정에서 화목하게 자란 공무원인데, 하는 짓은 남자친구 있는 여자한테 집적거리는 거면…… 뭔가 문제가 있어 보여. 과연 이걸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있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그런 얘기도 했어?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랑 당장 헤어지라고, 집에서도 나와서 따로 살라고, 그리고 나랑 사귀자고, 그런 얘길?”
“하기는 하지. 그런 얘기를.” 서연이는 골몰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 관계에 소홀하고 무심했던 건 맞지만, 본인에게 대체 어떤 특권적인 요소가 있기에 이렇듯 남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한단 말인가? 서연이야 나와 지내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치자. 그런데 제 삼자가, 지금 엄연히 존재하는 관계를 개선해볼 기회는커녕 평범한 연락조차 할 수 없게끔 한단 말인가? 이 년간의 관계를 하루아침에 정리하고 자신에게 오라고 종용한단 말인가? 이런 것 말고 얼마든지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난 어쩌면 서연이와 만난다는 그 남자가 그다지 연애경험이 많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혹은 소시오패스거나.
서연이는 내가 정리해놓은 침대 위에 누워 잠깐 쉬었다. 그리고 곧 캐리어 가방을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별거를 위한 것이었다. 왜인지 나는 그 모습이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서연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불쑥 들었다. 지금, 뭐라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끝끝내 후회할 것 같았다. 내게 붙잡을 권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얘기를 해야만 했다. 애걸복걸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내 앞에서 날 떠날 채비를 하는 연인에게. 그저 체념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지난 시간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고.
“이런 건 너무…… 너무 잔인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나는 바닥에 철퍽 엎드린 채로 말했다. 더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애매하게 하는 것 보단, 이게 낫지 않을까.”
“이 년을 함께 살았는데. 고작 며칠도 함께 있을 수 없다니.”
“난 기회를 충분히 많이 줬어.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 서연이는 옷을 챙기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넌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네 생각밖에 못해.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일손을 도우러 가야한다고 했어. 지금은 한밤중이고. 피곤하고 졸려 죽겠는데 넌 또 니 얘기만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잖아.”
“오늘은 여기 있다 가면 되잖아. 내가 내일 아침, 아니 새벽에 깨워줄게.” 나는 비굴하게 말했다.
“아니, 그럴 순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아, 너는 너무 인생을 짧게만 보고 살아. 당장 오늘, 당장 내일, 당장 다음주. 지금 니 옆에 내가 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건 없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게 아니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지긋지긋하고. 일단 떨어져있고 싶어, 나는. 서울에도 중간 중간에 올라올 거야. 지금 써놓은 단편들도 그림을 그릴 거고.”
“아…….”
“……넌 어떻게 끝까지 말 하나를 인정을 안 하는 거야? 내가 말하는 것 중에 네가 받아들인 게 단 하나라도 있긴 해? 이런 태도가 싫다는 거야, 나는. 난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그런데 너는 사람 마음을 네 멋대로 하려고 하잖아.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데도.”
“그래. 맞아…… 네 말이 맞아.” 나는 넋이 나간 채로, 간헐적으로 치미는 발작 증세를 끝까지 버텼다. 발작, 발작을 한 것이 컸다. 서연이는 내가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아니, 동물처럼 발작을 일으킨 것에도 정나미가 확 떨어졌을 것이다. 발작만큼은 해선 안 된다. 그런 일념으로 묵묵히 엎드려 견뎠다. 그러는 사이 서연이는 수원으로 가는 콜택시를 불렀다. 난 싱크대 아래 선반을 부여잡고, 거의 기다시피 다가가 뒷모습을 바라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문 닫힌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온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계속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뛰쳐나가서 붙잡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경찰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이라니! 나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간절히 부탁했을 때 넌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어리광이 전지전능한 마법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했다. 그건 마법이 아니라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