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12월 7일.
오후 한 시쯤 깨는 게 습관이 돼버린 것 같다. 내가 먹는 수면제에 타이머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늦은 점심으로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마저 먹었다. 금방 배가 불러 속이 더부룩했다. 커피를 마시고 장을 비웠다.
경제적인 문제가 한 번 들이닥치고 나면, 얼마동안은 그 생각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우스운 일이다. 설령 길거리에 나앉게 된들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어떤 식으로든 ‘괜찮아 보이는 생활’을 지속해 영위하려는 스스로가 짜증스럽다.
저녁나절까지 계속해서 대출을 알아봤다. 갖가지 대출조건이며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이해하느라 뇌근육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검색을 좀 하다 보니 대출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당한 조건의 옵션을 제공해주는 대출전문가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기실 돈을 잘 빌리는 데에도 돈이 필요한 것이다. 문득 나는 그런 대출전문가들은 돈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할지, 애초에 돈을 빌릴 일이 없도록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미용사도 제 머리는 깎기 어려운 법 아니냐고.
돈 문제에 관해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복잡스러워진다. 결국 내가 살고자 했던 건 관념적인 삶이 아닌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난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생각들을 좇으며 살고 싶었는데. 멀지 않은 가난이 눈길을 사로잡은 뒤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글도 철학도 메시지도 배가 부를 때―아니면 적어도 스스로 배고픔을 선택할 수 있을 때―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어제의 고민거리는 인간실존과 불변하는 가치였으나. 오늘은 어떤 은행이 대출을 내주는데 후하고 금리가 낮을지를 궁리한다. 내일 굶주리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조건을 안다고 해서 마냥 다 시도해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출은 조회만 해도 모든 기록이 남는다. 나의 신용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데조차도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이런 구조가 불합리한 건 아니지만 불공정하다고는 생각한다. 도전하는 것부터 업보가 되는 시스템이라니. 사정이 안 좋아 돈 좀 꾸겠다는 게 그리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본격적으로 뭘 알아보자니 이곳저곳 전화를 돌릴 수밖에 없다. 창업했을 당시에는 거의 매일을 전화를 걸고 받는 데 썼는데. 결론은 내가 그런 일에 소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 수밖에 없으니까 한 일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몇 번 전화를 돌리다보니 오히려 전화가 걸려오기까지 했다. 하여간 ‘누구누구가 돈 필요하다더라’ 하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진다.
더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주거래 은행에 찾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프리랜서라면 온라인 서류제출로는 적당한 평가를 받기 글렀으니까. 직접 가서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꼬박 이 년 전에, 서연이와 함께 보증금대출을 알아보러 다녔던 기억을 떠올렸다. 현재 살고 있는 이 집으로 함께 이사 오기 위해서였다.
나는 대출을 알아보러 다니는 일 자체에 무척 부담감을 느꼈다. 몇 번의 거절통보를 받으면서 상당히 좌절하기도 했다. 그 때 서연이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면서, 다음에는 잘 될 거라고, 세상에 은행이 여기밖에 없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나를 달랬다. 나는 그런 서연이를 너무도 의지했다. 그래서 마음껏 깊은 우울감에 잦아들었다. ‘이 사람은 내가 아무리 깊게 빠져도 구해줄 거야’라는 한가닥 믿음 하나로, 끝없이 침잠하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런 심연에서 꺼내주는 것만이 나를 향한 마음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가장 먼저 스스로를 침몰시키지 않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나락에 처박힌 나조차 사랑하게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이상 물에 빠지지 않을 각오부터 했어야 한다. 그 순간 아프고 숨 막히는 건 두 사람 모두이니까.
일찌감치 수면제를 먹고 누웠다. 삼십 분 쯤 지나서 평소처럼 머리가 멍청해지는 시점에, 공연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서연이가 날 찾아올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진심으로 슬퍼하기는 할까.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죽음 따위로 구걸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내일 아침을 보고 싶다. 서연이가 남긴 공백과 새벽공기의 흔적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걸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