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19)

12월 9일

by 이묵돌

12월 9일.


오전 열 시에 일어나자마자 은행에 갔다. 프리랜서로 살다보면 이른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게 드문 일이 되는데, 뭇 회사원들이 버텨야하는 겨울의 추위란 더 가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렵다. 쉽게 괴롭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나보다 더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무례한 일인 것만 같다.


정오가 되기 전에 거의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됐다. 원하는 대로, 아니, 원하는 이상으로 좋은 조건으로 일이 풀리긴 했으나 기분이 멜랑꼴리했다. 몇 년을 일해서 갚아야할 돈이 통장에 꽂혔다. 물론 필요한 돈이지만 잘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뭘 시작하기 전에 덜컥 겁부터 난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불에 솜을 채웠다. 아는 사람에게 요즘 들어 집안이 너무 춥다고 이야길 했더니 ‘이불을 얇게 덮고 자는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 여름이 되자마자 안에 들어있던 이불솜을 다 빼놓았다. 우리에겐 매년 이 이불을 빼고 다시 채우는 것이 계절행사처럼 돼있었는데. 지금부터의 ‘우리’란 내가 갚아나가야 할 채무가 돼있다.


이불속과 이불커버 사이에 있는 매듭을 꼼꼼하게 묶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혼자 하자니 살짝 땀이 맺혔다. 다 했으니 한 번 누워나 볼까, 했던 것이 생각 이상으로 따뜻해서 몇 시간이나 잠들어버렸다. 전날 밤에는 선잠을 잤다. 수면제를 먹어도 깊게 잠들질 못한다. 수면의 가치는 길이보다 깊이에 있다는 사실을 요즘 깨닫는다.


합정역에서 출판사와의 미팅이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갈 채비를 했다. 구면인 팀장님과 초면인 편집자님을 한 분씩 뵀다. 의외로 원고마감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건 아니었다. 밥도 사줄 겸 내 글을 담당해주실 편집자님도 소개할 겸 해서 불렀다고 하셨다. 또 최근에 올라오는 글들도 읽고 있다면서, 여러모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이게, 좀 얄궂은 얘기이기는 한데, 그 와중에 글이 좋더라고요. 여전히 잘 읽혀요.” 팀장님이 말했다. “그래서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계약만 해놓고 그동안 연락을 못했잖아요.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뭘요. 저도 따로 연락은 못 드렸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여러모로 꼬이기도 했고…… 힘든 걸 떠나서 기분이 좋네요. 잘 읽으셨다고 하니…… 저도 사람은 못 되나 봐요.” 조금 수줍게 반응했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하는 지 배우질 못했다. 저녁메뉴는 텐동이었는데, 나는 일부러 야채만 들어있는 메뉴를 골랐다. 고기를 소화시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출판사와의 만남이다보니 원고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났던 장소도 합정역 인근의 대형서점이었다. 나는 매대에 올라와있는 『시간과 장의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팀장님은 내가 『시간과 장의사』보다 훨씬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으시는 듯했다. 내년 설까지 중단편 소설집을 마감하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마침 긴 호흡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런 걸 온전히 몰두해서 쓰다보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가늠이 안 될 것이다. 슬픔조차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정확히 그런 일거리가 필요했다.


헤어지는 길에 책 한 권과 양파즙 한 박스를 받았다. 양파를 좋아하긴 하는데 양파즙은 먹어본 적이 없다. 이게 웬 거냐고 물어보니까 자회사에서 만든 거라 요청하면 준다고 하셨다. 힘들어도 몸은 챙기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감사히 받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양파즙이라니. 이런 걸 먹는다고 내가 피츠제럴드처럼 쓸 수 있을까?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피츠제럴드도 헤밍웨이도 아니니까. 그저 나대로 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다운 글이란 뭘까. 나는 누구일까.


내가 서연이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추천한 책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신을 양파라 부르며 무한한 부드러움과 사랑의 덩어리라고 했다. 한편 나는 마라탕에 양파를 지나치게 많이 넣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더러 서연이는 무슨 양파를 그렇게 많이 넣느냐면서, ‘차라리 양파로 국을 끓여먹지 그러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거기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양파즙 한 박스를 들고 멀뚱히 서있는 내 모습이 참 우스꽝스러웠다는 사실만 떠오른다.


저녁에는 서대문에 사는 친구를 만나 대화했다.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봤었지? 모르긴 몰라도 일 년은 넘었을 것 같다. 그 친구는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정말이지 몇 안 되는 친구 가운데 한 명이었다. 물론 공무원과 프리랜서 작가는 처한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카페도 문을 닫고 식당도 아홉시까지밖에는 하질 않으니 친구네 자취방에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대화를 하다가 헤어졌다.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주제는 없었지만 즐거웠다. 나는 이럴 때 불러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러고 보니 내가 느끼는 슬픔이란 참으로 비겁한 슬픔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에만 잠잠해지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 가볍게 씻었다. 그새 피부가 뒤집어졌는지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아팠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 무렵이다. 글을 조금 쓰다가, 수면제를 먹고 누웠는데―그 때서야 떠올랐다. 양파는 혼자 먹으면 별로라고, 꼭 어디에 넣어 먹어야 맛이 있다고. 나는 서연이에게 그렇게 대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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