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12월 10일.
오전에 알람을 맞춰놓았는데, 잠에서 깬 건 오후 두 시께였다. 벨소리를 들은 기억은 난다. 단지 일어날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어떤 일을 실제로 하는 데에는 바람보다도 까닭이 필요하다. 나는 더는 피곤하지 않아서가아니라 ‘더는 잠들 수가 없어서’ 일어난다.
머잖아 서연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일 일찍 집에 와서 옷이며 이런저런 짐들을 챙겨갈 예정인데, 점심이라도 같이 먹겠느냐는 얘기였다. 결정이 난 건 알고 있었다. 나는 헤어진다. 서연이는 수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이 집에 혼자 남는다. 시간을 더 끈다고 해서 판결이 뒤집히지는 않는다. 그간의 집행유예는 나의 심신미약 상태로 말미암은 것이다. 별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서 ‘알았다’고 했다. 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나는 내게, 그 제안을 거절할 권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창밖에 버스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도로에 인접해있어 유독 방음이 안 되는 집이었다. 그동안 엄청 신경이 쓰였을 법도 한데, 함께 있을 때에는 소음이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서연이는 참 시끄러운 연인이었다. 그 시끄러움이 얼마만큼의 침묵을 끌어안고 있었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혼자가 되기 전에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일단은 단순한 일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기존에 쓰던 카드를 몽땅 정리하고, 정기결제 따위를 주거래 은행으로 몰아넣기로 했다. 전화요금과 온라인 구독료, 인터넷TV, 렌탈료, 사대보험료 자동이체를 한 계좌로 통일했다. 모아놓고 보니 매 달 뭘 많이 내고 있기는 했다. 쓰지 않는 건 없었지만 이래서 돈 모으기란 그른 것 아닌가 싶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상담대기시간이 항상 길었다.
그러고 나서 간단히 집을 청소했다. 나는 깨끗한 인간이라곤 할 수 없지만, 집이 너무 더러우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인간이기는 했다. 특히 서연이가 양말을 이곳저곳에 벗어놓았을 때는 심할 정도로 잔소리를 퍼부었다. 청소기 돌릴 때 양말이 얼마나 거슬리는지 아냐. 이러니까 맨날 짝짝이가 되는 것 아니냐 등등. 이제는 그럴 양말도 잔소리할 사람도 없다. 마루 한 쪽 구석에 군청색 천쪼가리가 있어서, 부리나케 가봤더니 내 양말이었다. 나도 누구에게 잔소리할 처지는 못 된다.
좌우지간 청소하기가 편하기는 했다. 그럴듯하게 정돈하는데 삼십 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보니 나는 청소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청소를 하면서 서연이에게 잔소리하는 걸 좋아했었다. 이것 봐, 사랑하는 네게도 이런 결함이 있어,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나밖에 더 있겠니,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계속 여기 있어…… 라고 솔직히 말할 수 없어서 했던 소리들이다. 내가 널 의지하는 만큼, 너도 내게 의지해왔으면 했다. 그래야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 말들에 이골이 나서 떠날 줄이야. 나는 꿈에도 몰라 어리석었다.
얼마 있지도 않은 설거지까지 끝내자 이 이상 할 게 없었다. 시간이 미친 듯이 느리게 갔다. 그 때는 내가 전업주부남편이 돼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글이야 집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고. 나보다는 서연이 쪽이 경제 감각이 있는 편이니, 돈도 얼마든지 맡겨놓을 수 있었다. 반면 서연이는 집안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원체 나가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본인이 필요하다고 느껴지거나 특별히 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아닐 땐 굳이 치우려들지 않았다.
이따금씩 대청소를 할 때는 또 어땠나? 내가 바닥을 쓸고, 이불을 정리하고,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동안, 서연이는 구석에 있는 서랍장 하나를 완벽하게 정리하려다가 파김치가 되곤 했다. 나는 뭐가 됐든 눈에 보이는 일들을 먼저 했고, 서연이는 눈에 띄지 않으나 꼼꼼해야하는 일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했다. ‘당장’ 깨끗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과, ‘언젠가’ 깨끗해지면 상관없는 사람. 그 본질적 차이를 실감할 때마다 느꼈던 답답함. 좀 더 지나면 그리움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자못 괴로웠다. 끝내는 안 하던 게임을 다시 깔아 몇 시간을 내리 플레이했다. 무슨 병에 걸린 사람처럼, 밤늦게까지 컴퓨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불쑥 환멸을 느껴 파일을 지워버렸다. 컴퓨터에서는 모든 일이 참 쉽다. 지워버려도 언제든 다시 복구시킬 수 있다. 비록 어떤 것들은 영원히 사라진다 쳐도, 새롭고 자극적인 것들이 나날이 쏟아지는 통에 슬퍼할 틈이 없다. 사람과는 다르다.
한밤중에 저녁을 먹는 게 귀찮았다. 약과 함께 물 한 잔만 쭉 들이켰다. 불 꺼진 방에서 혼자 잠드는 것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