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
12월 13일.
반복하는 일 자체는 두렵지 않다. 무한정 반복하며 따분해지는 것이 두렵다.
잠에서 깼을 땐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악몽을 꿀 때마다 이불을 발로 차는 버릇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불솜을 채워 넣어놓았더니 몇 번 차는 것만으로는 떨어져나가질 않았다.
실은 아침에 잠깐 깨서 블라인드를 걷었다. 창밖에 보이는 건물들의 난간, 돌계단과 자동차 보닛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올겨울 첫 눈이었다. 나는 그 풍경이 꿈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후 세 시쯤 다시 깨서 보자 대충 녹기는 했어도 여기저기 눈 내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 며칠간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는 것에 부쩍 애를 먹는다.
특정한 음식을 먹고 싶은 건 가짜 배고픔, 뭘 먹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면 진짜 배고픔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뜬금없이 잔치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땀을 많이 흘려서일까? 별로 관계는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뭘 먹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이제는 반가울 지경이었다. 뭔가를 먹고 있노라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여물통에 머리를 처박고 살 수만 있다면. 가축으로서의 삶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야구모자를 푹 눌러 쓰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옷들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금방이라도 일을 저지를 범죄자 같다. 막상 할 일이라곤 일 인분에 삼천오백 원하는 잔치국수를 먹으러 가는 것뿐이지만. 눈이 내려서인지 전날에 비하면 날씨가 몹시 추웠다.
국수집은 걸어서 이 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칠 년 째 같은 동네에 살면서 수없이 지나다녔던 길목이다. 그럼에도 나는 서연이가 “저 국수집 가봤어?” 하고 묻기 전까지 그 건물에 식당 같은 게 있는지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이지 서연이는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장소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눈에 띄지 않았던 가게를 찾아내고, 직접 걸어서 찾아가게끔 만들었다. 나는 서연이를 만나기 이전의 오 년 보다도 최근 이 년 동안 이 동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더 많다.
가게는 나 이외의 손님이 없어 조용했다. 국수는 십 분쯤 지나서 나왔다. 나는 그릇의 절반도 다 먹지 못했다. 아무리 위장이 줄어들었기로서니 그 정도로 못 먹을 줄은 몰랐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미안한 마음으로 계산을 끝내고 돌아왔다.
집에서 책을 조금 읽다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함께 야구경기를 다니던 친구였다. 최근에는 코로나의 여파로 경기가 몽땅 취소되는 통에 얼굴 볼 기회가 없었다. 원래 가려던 술집이 문을 닫아서 가볍게 막걸리나 마시러 가기로 했다.
주말 저녁부터 냄새나는 남자 두 명이 만나 술을 마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친구는 불과 며칠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의 연인관계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고민하는 걸 들어왔기 때문에, 언젠가 헤어지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시기가 겹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마저도 내가 먼저일 줄은 예상치 못했고.
“이야, 왜 이렇게 말랐냐? 볼살 쑥 들어간 것 좀 봐라. 어우, 소름 돋아.” 친구가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나도 몰라. 스트레스 받아서 먹는 족족 게워내는데 어떡해.”
“힘들어도 잘 챙겨먹기는 해야지. 이런 거 보면 투수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건 그렇지. 지금이야 좀 익숙해서 나아지긴 했지만…….” 나는 막걸리 잔을 부딪으면서, 어련히 않느냐는 눈짓을 해보였다.
“많이 나아졌지. 내가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근데 투수는 내가 봤을 때 좀 이기적이어야 하거든? 근데 니가 아직도 그건 잘 못해. 넌 잘못 던졌다 싶으면 포수한테 사과를 한다니까.”
“최근 들어서는 잘 안 하잖아.”
“대신 미안하다고 손짓을 하잖아.”
“손짓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공이 땅에 처박혀서 오면 포수 입장에서도 무섭잖아.”
“무섭기는, 그게 포수가 할 일인데.”
“……최근에 상담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거든.” 나는 그다지 취기가 오르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마른 세수까지 해가며 정신을 다잡는 시늉을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뭘 부탁을 잘 못한다는 거야. 예를 들면 이런 거지. 내가 어떤 사람이랑 길을 걷고 있는 거야. 껴입고 나온 거에 비해서 날씨가 덥다 보니까, 한 쪽 팔에는 외투를 벗어들고 있어. 그런데 걷다보니까 내가 신발끈이 풀려있었던 거지. 넌 그럼 어떻게 할 거 같냐?”
“신발끈을 묶겠지.”
“들고 있던 옷은 어떻게 하고?”
“옆에 있던 사람한테 잠깐 들어달라고 해.”
“그렇지. 보통은 그래. 그런데 나는……” 나는 갑자기 목이 바짝 탔다. 상담 선생님께 똑같은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다. “나는, 근처를 휙 둘러보고 어디 난간 같은 걸 찾아. 옆에 있던 사람한테는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그쪽 난간까지 쪼르르 걸어가서 외투를 걸어두는 거야. 그리고 몸을 수그려서 신발끈을 묶고, ‘자, 이제 됐다. 가자’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거지…….”
“…….”
“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나도 잘 몰라. 어렸을 때부터 누구한테 도움 받을 수도, 받은 적도 거의 없다보니까 이렇게 자란 건지도 모르지. 근데 확실한 건 내가 남보다 독립적이거나 자존감이 높은 인간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거야. 나는 그 누구보다도 도움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지만, 어떤 심리적인 안전장치 때문에 말로 꺼내지 조차 못해. 어차피 거절당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것마저 일방적으로 부탁하거나 받는 일에 거부감을 느껴…… 거부감? 이걸 거부감이라고 해야 하나?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네. 이걸 뭐라고 하지?”
“이질감.”
“그래, 이질감. 이질감을 느껴…… 사는 것 자체에서도 그렇지. 다른 누구도 나처럼 느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어. 내가 견디는 것을 나눠가지지 않으리라는, 아주 인간본질적인 불신이 있지. 그래서 야구를 할 때도 투수를 했었나봐. 게임을 망치면 전부 투수 책임이니까.”
술을 얼마 마시지 않아서인지 돌아오는 길도 추웠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올 무렵 시계가 아홉시를 가리켰다. 새벽까지 책을 읽다가 불을 끄고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속이 더부룩해서 화장실에 갔다. 구역질을 몇 번 하고 입을 헹궜다. 거울 속 음울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찢어 올렸다. 기괴한 미소…… 말라있던 아랫입술이 툭 터져 피가 나왔다.
침대로 돌아가 수면제를 먹었다. 내일은 평일이다. 뭘 해야 할지도, 뭘 위해 살아야할지도 나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