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12월 17일.
오후 세 시에 깼다. 어제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약속을 잡아 오류동에 다녀왔다. 두부김치에 반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글의 소재로 쓰이는 건 사양이라고 해서 여기까지 써두겠다.
다녀오니 밤 아홉시였다. 일어난 지 여섯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날이 금방 저물어서 하루도 빨리 끝난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공평하게 나눠준다 하더라도, 쓰는 사람이 제대로 쓰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그렇다고 내게 서른여섯시간의 하루가 필요한 건 아니다. 막상 그 때가 되면 스물여덟시간을 자는 데 써버릴 것 같다.
최근에는 음식을 곧잘 먹는다. 먹었던 음식을 게워내는 일도 거의 없다. 식탁에 앉기까지의 과정이 힘들 뿐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런 얘기들을 했다. 마치 게임 속 NPC들이 ‘절망상태에 빠진 플레이어를 보면 다음과 같은 스크립트를 출력하시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다. 하기야 나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선 배경일 뿐이다. 한결같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그런 풍경이다.
취기도 조금 있었고, 내일은 오후 세 시에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일찍이 수면제를 먹었다. 침대의 헤드쿠션에 기대 앉아 책을 읽으면 괴상하리만큼 집중이 잘 됐다. 약을 먹고 읽다보면 어느새 잠들어 다음날 아침이 돼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읽었던 열 페이지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거꾸로 읽은 적도 꽤 많았다. 그 때와 지금의 차이라고 하면, 내 오른편에 누워 코를 골던 서연이가 없다는 것과, 이젠 약을 먹어도 쉽게 잠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새벽 세 시였다.
화장실로 걸어가는데 방바닥이 흔들렸다. 당연하게도 지진은 아니었고 약기운이 뒤늦게 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서 한 알을 더 먹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일기를 안 썼구나. 빌빌 기듯이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이 때 글쓰기를 시작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중간부를 어떻게 썼고 마지막을 어떻게 끝맺었으며, 언제쯤 침대에 가서 누웠는지가 의문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해 글을 쓰다보면 이런 부작용이 있다. 나중에 가서 부끄러울 수 있다는 것…… 나대신 불행할 내일의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딱히 진심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잘 알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