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29)

12월 19일

by 이묵돌

12월 19일.


열한시 반에 깼다. 오전에 일어난 건 오랜만인데, 그보다도 오후 세 시에 깨지 않은 게 더 다행스럽다.


요 며칠 동안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나 「해피버스데이」 처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사는’ 기분이었다. 다만 내 삶엔 영화처럼 특별한 일들이나 낭만적인 결말이 없다. 결말이라 여겼던 시간들은 모두 과거가 되고, 지나간 과거들은 오늘을 위한 과정처럼 느껴진다. 물론 삶이라는 영화에도 끝은 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엔딩 크레딧을 볼 수 없다는 건데…… 내가 주인공인 영화치고는 너무 불친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편이다. 영화가 끝난 뒤의 여운을 즐긴다거나, 왠지 낯익은 얼굴의 배우 이름을 확인한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파에 휩쓸려 나가기 싫어서였다. 반면에 서연이는 스크린 앞에서 맥없이 앉아있길 지루해했다. 본인 마음에 드는 영화인 경우에는 좀 더 있다가 나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런 걸 시간낭비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제 와서 보니 우리는 서로에게 꽤 잘 맞춰줬던 편 같다. 둘 중 어느 쪽의 취향에 맞출지는 순전히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좌우됐지만 말이다. 그건 서연이와의 관계에서 가장 좋았던 동시에 가장 힘들었던 점이기도 했다. 연인관계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었다는 것. 마음을 터놓지 못해서가 아니고, 너무 많이 열어젖혔기 때문에 지쳐갔다.


중편소설 한 편을 마감했다. 아주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 비겁한 감상이다. 편집자님께 부탁해뒀던 『시간과 장의사』 열 권이 오후에 도착했다. 평일이 되는대로 상담사 선생님께 한 권 부쳐드릴 예정이다.


고구마 한 박스를 주문했다. 흙을 씻어내기 위해 밀린 설거지부터 해야 했다. 먹기 좋게 생긴 모양으로 다섯 개 골라서 군고구마를 해먹었다. 언제인가 고구마를 너무 많이 먹어댄 나머지 방귀 냄새가 극심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 땐 서연이에게 한 소리 들어먹은 게 분해서, ‘사람이 방귀 뀌는 게 무슨 잘못이냐’ 는 주제로 작게 다투기도 했다. 이젠 지나간 얘기다.


저녁에는 게임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일어났어도 일과가 똑같다. 잠들기 전에는 양치를 한다. 전처럼 먹은 게 없지도 않은데 얼굴 살이 패여 가냘파 보인다. 자정쯤 약을 먹었지만 의식이 너무 뚜렷했다. 두 시간 쯤 맹하게 누워있다가 한 알을 더 먹고 나서야 겨우 잤다. 병보다는 약에 대한 내성이 더 빨리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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