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32)

12월 22일

by 이묵돌

12월 22일.


오전 아홉시 반에 깼다. 알람이 미처 울리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학창시절부터 그랬다. 알람소리에도 일어나지 못할 나 자신이 못 미더워서, 그대로 자는 둥 마는 둥하다가 너무 이른 시간에 일어나버리곤 했다. 이 정도로 날 불신하는 동시에 미워하는 사람이라곤 세상에 나하나 뿐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이라면, 숫제 관심이 없을 것이고.


일찌감치 씻고 은행 업무를 보러 나갔다. 대기 중인 사람이 없어서 금방 마무리 됐다. 우체국에 가서 상담선생님께 책을 부쳤다. 집에 잠깐 들렀다가 사당으로 출발했다.


속이 불편한 관계로 점심식사를 함께 하진 않았다. 작가님께 ‘왜 이렇게 메시지 확인이 늦는 거냐’며 한 소리 들었다. 함께 일하게 된다면 이런 건 신경을 써야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요즘 정신머리가 통 없었다고, 아무튼 이 뒤로는 부지런히 확인하고 보고를 드리겠노라 했다. 이러나저러나 계약서는 잘 작성했고, 계약금도 금방 입금이 됐다. 돈을 받으면 일을 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정비소에 들러 타이어 공기압을 채웠다. 주행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시동을 킬 때마다 알림 텍스트가 뜨는 바람에 신경이 쓰였다. 운전석에 멍하니 앉아 ‘이제는 내 차도 아닌데……’ 라는 기분에 빠져있는 내가 싫다. 이 우주엔 나의 일부가 아님에도 신경써야할 것들이 수없이 많다. 이제는 그런 걸 알 나이도 되지 않았나. 여태 그런 사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살아왔으면서.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면서.


집에 도착하니 오후 세 시 반이었다. 곧바로 뭔가 생각이 나기에 시나리오의 플롯을 대강 짰다. 금방 쓴 것치곤 꽤 괜찮아보이는데. 내일이 돼서 볼 땐 또 느낌이 다를 것이다. 잇달아 프롤로그를 조금 쓰다가, ‘너무 앞서나가는 것 아닌가’ 싶어서 적당히 그만뒀다. 고작해야 오늘은 계약서를 작성했을 뿐이다.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하기 전에 얼개를 모두 짜버리는 건, 미련한 짓을 넘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방적인 통보로 느껴질 것이다.


며칠 동안 붙잡고 있던 게임을 그 날로 마무리했다. 메인이 되는 이야기는 다 진행한 것 같고, 나머지 다른 퀘스트를 전부 깬다는 건 무지하게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확신이 들어서 그냥 게임 자체를 지워버렸다.


―서연이에겐 나와의 관계가 이런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확신에 가득차서, 더 이상 볼 것도 기대할 것도 없어서 지워버리는.


책을 읽고 있는데 별안간 순대 생각이 났다. 내 경우 순대 내장을 먹긴 먹는데, 간은 퍽퍽한 느낌 때문에 좋아하지 않고 허파만 잘 먹는다. 아무리 식욕이 없다 싶어도 입에 대면 들어간다. 한동안 잘 먹던 순대를 싫어하게 된 적도 있었다. 먹고 나서 속이 부대끼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늘 와서는 부대낌 역시 순대의 일부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그리 생각한다고 해서 소화가 잘 되는 건 아니었다. 갑갑해서 스쿼트를 몇 세트 하고 약을 먹었다. 양치를 한참 했는데도 냄새가 입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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