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12월 24일.
오전 아홉시에 일찍 일어났다. 이쯤 되니 기상시간이라는 것이 독립된 사건 같다. 잠드는 시간도 수면제의 복용량도 별 관계가 없어 보이고,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는 느낌에 가깝다.
정오가 지나 오후 두 시 무렵까지 줄곧 책만 읽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바깥에 나갔다. 아주 허기가 져서 그랬던 건 아니고, 느닷없이 면으로 된 뭔가를 먹고 싶었다. 며칠 전에 갔던 국수집에 또 갔다. 이번에는 비빔국수였다. 호기롭게 입을 댔으나 반밖에 먹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오후 다섯 시까지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끝끝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 권을 다 읽었다. 분량이 좀 있는 편이지만 대단한 작품이었다. 뒤표지를 다 덮기도 전에 글이 쓰고 싶어졌다.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누구의 말마따나 축 처지고 아주 우울한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대놓고 독자를 위로하려고 썼다는 느낌은 없지만. 바로 그런 점이 가장 큰 위안을 준다. 애써 위로하지 않는다는 점이…… 써놓은 글들이 하나같이 구질구질하다는 건 그 다음으로 좋다.
날짜 상으로 크리스마스이브이긴 했다. 헌데 연휴 느낌은커녕 한 해가 다 끝나간다는 기분조차 없다. 크리스마스씩이나 되는 공휴일. 집에 처박혀 책이나 읽고 있는 것이 궁상맞을 수야 있다. 하지만 지금은 별달리 할 일이 없다. 삶이 추레한 점이야 지난 한 달 내내 비슷했다. 누군가 떠들썩한 연말을 홀로 보내는 일이 괴롭게 느껴진다면, 그건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은 그렇게 해도 기분은 묘하다. 국수 주문할 때 빼면 종일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그사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싶어 “아―” 하고 소리를 내봤다. 멀쩡하다. 아무한테나 전화라도 걸어볼까. 그건 안 될 일이다.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이런 날 괜히 연락해서 그들의 행복한 연휴를 망칠 순 없다. 더는 미움 받고 싶지 않다. 어쩐지 이제와서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죄라고 하니 몇 달 전에, 비교적 최근에 싸우면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큰 싸움일수록 이유는 사소한 법이다. 하여간 그건 싸우고 있을 당시의 대화는 아니었다. 실랑이가 끝난 다음에 서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털어놓는 타이밍이었다. 아까는 참 화가 많이 났었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어, 같은 말들을 꺼내던 시간. 그때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까는 네가 너무 증오스러워서, 정말이지 죽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이런 정신 나간 말에 이런저런 원인을 따지는 것이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이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고, 또 왜 그런 실언을 했는지를 글로 정리하다보면 최소한 ‘똑같은 짓을 할 확률’은 낮아질 거라고 본다. 물론 내가 개선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일 때의 얘기겠지만.
아무튼 거기에서 ‘굳이’ 이유를 찾아내보자면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연인사이 감정에 대한 표현은, 말하자면 분필 같은 것이다. 가령 누군가와 사귀기 시작할 당시에는 ‘사랑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러나 오래도록 지나치게 많은 대화를 나누다보면―특히 나처럼 본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너무 많은 말을 내뱉어버리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이―처음에 했던 단순한 말들로는 도저히 자신의 감정을 증명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는 상대를 향한 마음에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다. 상투적인 표현은 닳고 닳아서 더 이상 안 하느니만 못해진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어휘를 찾는 한편,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마음을 증명하려고 들었다.
이런 유의 강박증은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놓을 때 더 도드라졌다. 나는 서연이와 크고 작은 말싸움을 벌이면서, 어느 순간부터 ‘네가 미워’ ‘넌 나한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줬어’ ‘넌 너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라는 말들로는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내 입장에선 그런 것 같았다. ‘힘들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해왔다면, 이제는 ‘당장이라도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다’ 쯤으로 말하지 않으면 신빙성이 없어진다. 그마저도 두세 번 쓰고 나면 곧이 곧대로 전달되는 법이 없다.
둘째. 나는 서연이를 한 명의 예술적 인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시드라면 그녀는 낸시고, 그녀가 보니라면 나는 클라이드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해’라는 말쯤이야. 문학적인, 혹은 예술적인 관점에서, 불가피한 전위성을 가진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도 그럴 수야 있다. 누군가에 대한 강력한 애정이 일순간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증오로 탈바꿈해 살인충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그런 감정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것이 허용되는 영역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인 이야기 속이다. 적어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토록 극단적인 어휘를 실생활에서, 그것도 서로 사랑한다는 사람 사이에서 꺼내놓아서는 안됐다. 그건 머저리 같은 표현이었다. 그 어떤 의심의 여지없이,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리라는 오산이었다. 듣는 사람에게 그 말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는지는 이제와 가늠할 길이 없다.
애당초 그런 말은 일부분이라도 진심이 아니었다. 나 같은 겁쟁이에게는 누굴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설령 만에 하나 내가 어떤 누군가를 죽일 만큼 미워했다면, 그런 고로 ‘어떻게든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느 날 불쑥 상대방이 ‘떠난다’고 해서 내가 뭐라 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나는 자연재해 같은 인간이다. 가까이 있을수록 더 많은 피해를 끼친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도 나 같은 인간은 되도록 혼자 있는 쪽이 적절하다. 결국 외롭다는 생각은 이기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걸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외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