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37)

12월 27일

by 이묵돌

12월 27일.


오후 세 시가 아닌 한 시에 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다행스러운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습관처럼 커피를 마셨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커피가 필요했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값비싼 카페 라떼가 됐든 한 잔에 천 원하는 싸구려 아메리카노가 됐든 일단은 마셔야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간혹 하루가 다 지나갈 때까지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때에는 ‘아, 왠지 허전하다 했어. 오늘 유독 일이 안 풀리는 이유가 있었다니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하긴 이 정도 중독쯤이야 현대인들에겐 그다지 특별하다고 볼 수도 없고, 차라리 지나치게 전형적인 요소라 할 것이다. 아침잠을 깰 땐 한 잔의 커피를 마셔야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뒤뜰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워야하며, 눈에 띄게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술이라도 한 병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습관처럼 해낸다. 그 고루한 습관들이 모이고 뭉친 덩어리가 인생이거니와, 처음부터 다른 어디에도 비슷한 걸 찾을 수 없었다는 듯.


한편 나는 본격적인 하루의 시작을 위해 커피를 요구하면서, 제 손으로 만들어 마실 생각은 없었다. 집에는 캡슐커피가 몇 개 남아있었다. 카페에서 머신으로 뽑아낸 커피와는 사뭇 다른 맛이 나긴 해도, 일이 분 남짓한 시간에 뚝딱 뽑아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나은 대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지 않았다. 마시고 싶을 뿐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미 커피를 가장 쉽게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나는 하지 않았다. 단지 누가 내 턱밑까지 커피 잔을,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빨대까지 꽂아서 가져다주길 바랐다.


같잖은 고심 끝에 배달 주문을 했다. 아―비록 속된 말이기는 해도―이게 얼마나 좋은 세상이란 말인가. 돈 몇 푼만 있으면 집에 가만히 앉아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내가 해야하는 건 바보같이 시간이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벨소리에 맞춰 현관까지 걸어 나가는 것, 배달원과의 눈빛을 최대한 피하면서 봉투를 받아 챙기는 것뿐이다. 최소 주문금액을 맞추기 위해 빵 한두 개도 같이 시켜야했지만…… 덩달아 스스로의 태만함에 소름이 끼친다. 쉬어야할 사람들은 지금도 땀을 흘리는데. 나는 누릴 자격도 없이 마음껏 게으르다. 좀 더 편하게, 보다 그럴듯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이유에서가 아니고, 단순히 ‘몇 분이라도 늦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서’ 애꿎은 타인의 부지런함을 제물 삼는다.


연휴도 대강 끝나가겠다, 이제는 공휴일이 아닌 평범한 주말이었다. 초저녁에 술 약속을 잡았다. 한때 자주 드나들었던 민속주점이었다. 막걸리 두 대접에 육전 한 접시를 곁들여 먹고 마셨다. 어째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또렷해졌다. 고 김광석 씨의 노래가 몇 곡 흘러나왔다. 술이 너무 차가워서 이가 시렸다.


아홉시가 돼서 일찌감치 마감했다. 거나한 상태로 도림천을 따라 걷다가 돌아왔다. 못 보던 사이 입고 있던 코트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방구석에 기대 삼십 분쯤 졸다가, 속이 울렁거려서 설렁탕을 한 그릇 시켰다. 잘 먹고 나서 변기에 게워냈다.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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