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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06. 2021

이별에 관한 기록 (46)

1월 5일

1월 5일.     


 차츰 해가 나는 것 같다. 등과 허벅다리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자는 동안 이불 밑으로 더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거기서 작게 발장구를 치며 밍기적대는 시간이 좋았다. 그 따뜻한 세계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사람은 왜 이불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하지? 그냥 이대로 쭉,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그야 하루 종일 누워서만 시간을 보내야한다면 답답해 죽을 맛이겠지. 이불 밖은 무시무시하지만, 얼마지않아 나갈 수밖에 없다. 시험 삼아 이불에서 다리 한 쪽을 쭉 빼봤다. 그러자 발끝에서부터 하반신 전체가 딱딱하게 얼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도로 집어넣었다.


 왠지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냉탕에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푹푹 찌는 한여름에,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무더울 때마저 그랬다. 친구들과 목욕탕에 갔을 땐 누군가 장난삼아 뒤에서 밀치지나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속으론 ‘다들 들어가는 데 나라고 못할 거 있나’ 하면서도, 차가운 탕 속에 한 쪽 손을 움푹 담근 뒤에는 마음이 바뀌곤 했다. 목욕은 원래 따뜻한 물로 하는 거라면서.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하나, 필사의 용기를 내서 온 몸을 던져놓는 것밖에는 없었다. 처음엔 곧장 심장마비로 죽을 것처럼 차갑겠지만. 몇 초를 더 버티고 나면 그럭저럭 있을만하다는 생각이 들고, 몇 분이 더 지나면 거기서 잠수며 수영까지도 별 문제없이 했다. 결코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들을 할 때에는, 손끝발끝이 아닌 심장부터 집어넣어야한다. 


 시계를 본 건 정오 때였는데 일어날 무렵에는 한 시가 조금 넘었다. 


 일주일 전에 잡은 약속이었다. 합정에서 밥을 얻어먹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우체국을 찾아 글과 그림을 배송했다. 엽서를 쓰는 것도, 이렇게 포장해서 타지에 부치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찡했다. 이런 것들을 슬퍼하지 않는 법도 나중에는 배우게 될까? 


 오후 세 시에 쌀국수를 먹었다.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라 좋았다. 다만 뜻하지 않게 2차로 맥주를 마시게 됐다. 나는 취하기 전부터 어디에 취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고, 오히려 취하고 나서 취하지 않은 것처럼 대화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여덟시 반쯤 집에 돌아왔다. 간단히 씻고 「안나 카레니나」 1권을 꺼내서 읽다가 깜빡 잠들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그대로 푹 잠들 수도 있었을 텐데. 맥주를 마실 때도 안주는 거의 먹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오므라이스는 왜 오므라이스일까. 검색해보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오믈렛+라이스로 해서 발음이 준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엄마에게 오므라이스를 만들어달라고 죽어라 졸랐던 날이 있었다. 엄마는 ‘그건 분식집에서나 먹는 거지, 집에서 만들어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면서 핀잔을 줬다. 나는 모양이 좀 별로더라도, 맛이 좀 별로더라도 괜찮다고 했다. 그냥 엄마가 만들어준 오므라이스를 먹고 싶다고. 어린아이만의 교활한 뉘앙스로 질질 짜면서 말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오므라이스 비슷한 것을 내놓았다. 비주얼로만 보면 계란볶음밥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았다. 맛은 없었다. 건더기라고 할 건 양파와 당근뿐이었던 데다 그마저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서 무척 짰다. 나는 첫 입에 그만 인상을 팍 써버렸다. 엄마는 그걸 보고,


 “거 봐라. 오므라이스는 사 먹는 거라니까. 쓸데없이 졸라서 손만 가게 만들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가 요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도 그렇게나 간을 못 맞출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엄마는 자신을 귀찮게 한 벌로서, 괜히 맛없는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복수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 나이에 한 생각치고는 참 못됐다 싶다. 서른 가까이 나이를 먹자니 깨달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그저 서툴렀을 뿐이다. 스스로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는 게 두려울 만큼.


 하여간 그 뒤로 오므라이스는 꼭 분식집에서만 사먹었다. 사실은 그게 그리 특별한 음식도 아니고, 오히려 간단한 쪽에 속하는 요리라는 걸 알고 나서도. 나는 오므라이스를 집에서 해먹는다는 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언제인가 서연이에게 이 얘기를 털어놓았던 기억이 났다. 서연이는 내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더니, 조만간 내게 직접 오므라이스를 해주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너한테 뭘 해주면 좋을까. 하이라이스를 집에서 해먹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하이라이스는 해본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거의 없는데.” 내가 말했다. 


 “내가 볼 땐 네가 잘할 것 같은데. 카레를 잘 만드니까.” 서연이가 대답했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조만간 대단한 하이라이스를 만들어주겠다고 받아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먼저 약속을 지켜주길 바랐던 것이다. 


 나는 밥 대신 수면제 두 알을 깨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식사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오므라이스 같은 걸 먹기엔 더욱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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