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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07. 2021

이별에 관한 기록 (47)

1월 6일

1월 6일.     


 선잠을 자다 새벽에 일어났다. 아마도 아침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책을 읽다가 시계를 봤을 때는 여섯시 반이었다. 얼마 뒤부턴 눈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책에 있는 글자도, 벽에 붙은 그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몇 시간을 자기는 했는데 피로가 풀리진 않았다. 차라리 몸이 무거워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손목 발목에 납덩이를 하나씩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다만 엊저녁에 약을 먹어놓고 또 먹을 순 없는 일이었다. 뒷목을 기대듯이 누워 한 시간을 넘게 뒤척거렸다. 위장에서 고약한 소리가 났다. 나는 뱃속을 달래다시피 고구마를 욱여넣고 나서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 두 시간쯤이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 할 시기였다. 다음 주에 있을 특강 자료를 만드는데 몇 시간을 썼다. 담당자에게 메일로 파일을 부쳤다. 창밖으로 뉘엿뉘엿 해가 이울었다. 동지冬至가 지났지만 여전히 아침이 짧다. 


 오랜만에 서연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이 작업하지 않은 단편이 있으면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숫자를 맞춰보니 단편이 하나 빠져 있었다. 마지막 글을 보냈다. 머릿속에서는 습관처럼 다음 작업의 얼개를 짰다. 그래, 그게 꼭 단편일 필요는 없지. 그런 주제라면 중편이나 장편으로 써도 나쁘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는 마음의 무게추를 다른 곳에 매달아야한다. 당장에 손발이 무거워 마음도 무겁다. 


 약속이 있어 신림역으로 나가려는데 눈이 흩날렸다. 눈발이 거세지는 것이 영 심상치 않아서, 가는 도중에 되돌아와서 가장 두꺼운 패딩으로 갈아입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현관문 밖으로 가려는데 몸이 덜컥 세워졌다. 동시에 북! 하는 소리가 귀밑을 때렸다.


 ‘……북?’


 현관 문고리에 주머니가 걸려 패딩이 찢어진 것이었다. 그건 내가 사 년 전에, 큰 맘 먹고 할부로 질렀던 고가의 패딩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그렇게 비싼 옷을 사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매년 추울 때 입을 옷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아예 평생 입을 옷 하나를 큰 돈 주고 사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다분히 합리화였지만. 확실히 비싼 값을 하는 옷이었고 나 역시 잘 입고 다녔다. 겨울이 될 때마다 걱정도 덜었다. 아예 소파에서 이불처럼 덮고 잠든 적도 있었다. 


 그게 찢어졌다. 오른쪽 주머니가 뜯겨나가면서 그 주변이 완전 작살나버렸다. 이게 수선이 되긴 할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약속에 늦게 생겼으니 좀 전의 코트라도 입고 나가야했다. 헛걸음한데다 막대한 손해까지 봤다. 바삐 눈길을 헤치고 걷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당장 내일부터는 뭘 입고 다녀야하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다 패딩을 입고 있어서 더욱 서러웠다. 더구나 코트 겉면에 눈이 잔뜩 달라붙어서, 도착할 무렵엔 눈사람이나 다름없는 꼴이 돼있었다.


 아홉시가 돼서 집에 돌아가려는데, 그동안 눈발이 잦아들기는커녕 눈보라로 진화해있었다. 두 시간동안 눈이 엄청나게 쌓인 모양이었다. 버스정류장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전광판을 보니 집으로 가는 버스가 사십 분 뒤에나 도착한다고 나왔다.


 현기증이 났다. 생각해보면 집까지 아주 못 걸어갈 거리는 아니었다. 예전에 한 번 역에서 집까지 걸어서 간 적이 있는데, 확실히 삼십 분은 넘게 걸렸다. 심지어 그 땐 화창한 날씨였으니 이 눈길에 걸어가자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 택시는 잡힐 리가 없었다. 희망을 갖고 앱을 켜보았으나 헛물을 켤 뿐이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다. 택시가 쉽게 잡혔다면 정류장이 이렇게 붐비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버스를 기다리는 쪽이 나을까? 그런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내가 가는 길이 아닌 방향의 버스가 왔는데, 올라타려던 사람 중에 절반도 오르지 못했다. 눈 내리는 꼴을 보니 금방 멈출 것 같지도 않다. 사십 분은 기다려야하는 최소 시간인데다가, 그동안 기다린다고 해서 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갑작스런 폭설에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하나같이 막막한 소리를 했다. 나는 걸어서 가야 했다.


 ―한겨울에 서연이와 산을 오른 적이 있다. 비교적 화창한 지상과 달리, 산중턱에는 눈이 안 녹고 남아있었다. 멋도 모르고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조난당할 뻔 했다. 몇 번을 크게 넘어졌는지 모른다. 포장이 아예 안 된 길에서는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내려갔다. 둘이서 싸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몸도 만신창이가 됐다. 그나마도 중간에 만난 아저씨가, 이거라도 쓰라며 간이 아이젠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일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눈 때문에 도시는 맛이 가버린 것 같았다. 좁은 도로에 차는 막히고 사람들이 돌아갈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예고도 없이 내린 눈이다 보니 제설할 틈도 없다. 그 때문에 간선버스나 마을버스나 아주 작은 오르막도 오르지 못한 채 공연히 뒷바퀴만 돌리는 것이었다. 크낙션 소리가 곳곳을 울렸다. 신발바닥은 그보다 미끄러울 수 없었다. 갈 길은 먼데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내딛어야 한다. 발은 한참 전에 얼어붙어서 감각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는데…….


 꼭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나는 인적이 뜸한 골목에서 택시 한 대가 멈춰서는 모습을 목격했다. 비상등이 켜져 있었고 뒷좌석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에 있던 손님은 막 계산을 마치고 있는 듯했다.


 ‘빈 차다!’ 그 순간 나는 필사적으로, 뛸 순 없으니까 가급적 빠른 걸음으로다가 택시에 접근했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택시 안에는 히터가 켜져 있었다.


 택시는 거의 걷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덕분에 택시비는 평소의 세 배나 됐다. 하지만 나로선 곧장 얼어 죽을 것 같았던 상황이었다. 기사님이 승차거부를 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이십 분이 지나 집에 도착했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씻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고작 집에 돌아온 것뿐인데, 지금 막 기나긴 모험을 끝내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들 집에 무사히 돌아가야 할 텐데…… 한 숨 놓고 나서 남 걱정이라니!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 또 어디 있나 싶다.


 하기야 한겨울은 눈 내린 다음날이 가장 춥기 마련이고, 단벌신사용 패딩은 한 쪽 주머니가 뜯겨나갔다. 그렇지만 그런 걱정은 내일 하도록 하자. 내게도 지칠 자격은 있다.


 나는 약을 평소의 절반만 먹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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