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Jan 09. 2021

이별에 관한 기록 (48)

1월 7일

1월 7일.     


 오전 열한 시에 일어났다. 눈이 그친 날 아침이 으레 그렇듯 하늘이 높고 볕이 강했다.


 점심에는 미팅이 있었다. 이전에 함께 책을 작업했던 편집자님께 연락이 왔던 것이다. 딱히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고, 간단하게 식사나 하면서 근황이야기나 나누게 됐다. 역전으로 가는 길 내내 쌓였던 눈이 반쯤 녹아 질퍽거리는 소리를 냈다. 


 편집자님과의 대화는 매우 즐거웠다.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다시 연락이 온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이게 조금 무책임한 말일수도 있지만, 나는 뚜렷한 목표치를 정하고 달성하는 데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성과를 최우선순위로 올려놓지도 않는 편이다. 아무렴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단지 과정이 지루하지 않도록 애써보자는 주의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결과에 대한 압박이 극심한 작업은 처음부터 사양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에겐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명확하다. 대부분의 판단은 결과로 이루어진다.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다. 실패한 이유는 단지 그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다는 것으로 뭉뚱그려진다. 때문에 진정한 노력과 노력에 따르는 성과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다분히 종교적이라고 느껴진다. 글쎄, 독실한 신자는 자신에게 들이닥친 불행을 시련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적어도 내 생각에는, 성공 자체가 부단한 노력으로서만 달성되는 것 같지는 않다. 필사적으로 했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실패하고,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타고난 재능과 행운에 따라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이들은 대개 사회적 성공을 얻고도 그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강박적인 증명욕구에 시달리게 된다. 의도치 않았던 성공이 있었다면 당연히 예상치 못한 실패도 있을 테니까. 이미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오직 스스로에 대한 진솔한 평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나 모든 걸 쏟아 부은 뒤에 느끼는 후련함만이 절대적이다. 타인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백 퍼센트 속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만약 그럴 수 있다면 병리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린 세상이라지만. 정작 혼자 다 해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나만해도 속된 말로 ‘연필 한 자루 못 만드는’ 인간이다.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기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또 그것이 프로젝트성으로 수행하는 작업이라면, 목표한 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을 각오로’ 다른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게라도 해서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결과적으로는 잘 되긴 했는데, 정말 지긋지긋한 인간이었지’보다는 ‘그래도 같이 할 땐 진짜 재미있었어’라는 기억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저녁부터 밤까지 죽 게임시나리오 구상에 골몰했다. 군더더기 없는 플롯을 짜려면 어느 정도 형태적인 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4용지 뭉텅이를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아이디어 노트로 썼다. 글씨는 나아진 게 없고 그림은 한층 똥손이 됐다. 골치가 아프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음 주에 있을 개발사와의 미팅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할 것이다. 


 밤에는 책을 읽다가 약을 먹고 누웠다. 내일은 금요일이다. 난로 위에 덥혀둔 주전자 소리가 요란하다. 싼 게 비지떡이라더니 내일은 좀 더 괜찮은 물건을 찾아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에 관한 기록 (4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