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Jan 10. 2021

이별에 관한 기록 (49)

1월 8일

1월 8일.     


 새벽에 깼다. 머리 뒤쪽이 지끈거렸다. 예전엔 두통이 있을 때 더 쉽게 잠들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반대가 돼간다. 책을 읽으면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완연한 아침이 됐다. 나는 잠의 할당량을 채우는 걸 포기하고 몸을 씻었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쯤해서 찢어진 패딩도 수선을 맡겨야 할 것이고. 갖고 있는 종이가방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패딩을 개어 넣었다. 자꾸만 바람이 다시 차서 금방이라도 봉투가 찢어질 것 같았다.


 수선집에 다녀오는 길, 오전 일찍 숨도 고를 겸 코스트코에 다녀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지점은 광명에 있었다. 서연이에게 차를 돌려주고 나면 한동안 찾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관악구와 경기도 광명시는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데, 대중교통편이 여의치 않아서 차가 없으면 선뜻 길을 나서기 어렵다.


 나는 코스트코나 이케아같은 초대형 마트를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돈이 없으니 오래 돌아다녀봤자 사는 물건은 거의 없지만―실제 매장보다는 푸드코트에서 더 많은 돈을 쓰곤 했다―바퀴달린 커다란 카트며 가지런히 진열된 매대를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할인코너 앞에 줄을 늘어선 사람들과 구매를 주저하는 사람들. 시식용 만두를 작은 크기로 자르고 있는 마트 직원들, 그리고 헤드라이트 불빛 사이로 바쁘게 손짓하는 주차요원들…… 나는 즉석에서 데워먹을 수 있는 곤드레밥 한 묶음과 작은 스테인리스 주전자, 여섯 개 들이 캔맥주 묶음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정오가 지나 있었다.


 신발을 벗자마자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들어갔다. 세면대 구석구석에 때가 낀 얼룩이며 보기 싫게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이 눈에 띄었다. 다짜고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리끼리한 천장까지 다 닦을 각오였는데, 솔질을 몇 번 하자마자 팔이 아파서 세면대와 샤워부스만 대충 손봤다. 


 청소하는 동안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있었다. 발신자는 내게 시나리오 외주를 맡긴 회사였다. 지난 며칠 동안 업무에 진전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서 연락을 했다고 했다. 나는 꽤 윤곽이 잡히기도 했고, 이야기 속의 주요한 요소와 서술 방향성에 대해서도 가닥이 잡혔지만, 지금 당장 문서화해서 보여줄 만한 것은 없다고 말씀드렸다. 다음 주 주말까지는 알아볼 수 있을법한 무언가를 만들어보겠다고 덧붙였다.


 제법 타이트한 일정이기야 했다. 그래도 기획이라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업인데다가, 이런 종류의 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오해를 사게 된다. 결과로 신뢰받기 위해서는 신뢰받을 수 있는 과정도 필요했다. 프로젝트 업무에서는 ‘내게 맡긴 일에 대해서 당신이 어느 만큼의 기대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으며, 지금 내겐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하는 의욕과 열정이 충만한 상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어야 한다. 개인적인 호의가 아니라 책임으로서 말이다.


 그렇지만 당일치기로 스키장을 한 번 더 다녀오자는 제안에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다음 주초부터는 대학교 특강부터 시작해 바쁜 일투성이다. 틈틈이 쉴 시간이 없진 않겠지만 마냥 참는다고 될 일도 아니니까. 스스로에게 충분한 여가를 주고 나면 일에 집중하기도 쉬워지겠지…… 같은 합리화 과정을 거쳐 다음날 오후에 출발하기로 했다. 


 저녁에는 술 약속이 있었다. 요 며칠간 한파가 대단하기도 했거니와 바깥에서 뭘 마시기에는 영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집에서 만나 간단히 한 잔씩 걸치기로 했다. 만나기 무섭게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선물을 주고받았다. 나는 수선화 한 떨기를 받고, 삽화가 있는 프랑스 시집 한 권을 건넸다. 그다지 특별한 날도 아닐 때에,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 받자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수선화의 꽃말은 내면의 외로움, 나르시시즘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연락이 왔다. 그냥 보기 좋아서 산 꽃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꽃말이 희한해서 이상한 의미로나 전해지지 않았을지 걱정된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그 수선화로부터 다른 어떤 꽃에서보다 더 큰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나르시스, 나르시스. 제 스스로밖에 사랑하지 못해서,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에 빠져죽은 나르시스……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태어났지만, 그 누구보다 외롭게 죽고 말았다. 


 나는 빈 와인병에 물을 가득 채웠다. 선물 받은 수선화 몇 송이를 거기 꽂아 햇빛 잘 드는 창가에 가져다놓았다. 나는 외롭게 태어나 외로워졌지만, 결코 혼자서만 외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겨울하늘은 아스라이 파랗다. 맑은 날 호수처럼 내 얼굴을 마주 비춘다.


  ―수선화들이 거기 있다. 쌀쌀한 공기에 꽃잎이 파르르 떨었다. 나도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지듯이 빠져서, 숨도 못 쉬고 허우적대다가 죽는 상상을 오래도록 해왔다. 그건 너무도 간단한 일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같이 무한히 보잘 것 없고, 혹은 가장 현명한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선화는 위로로 꽃피지 않는다. 피었기 때문에 위로받고, 위로하기 때문에 꽃핀다. 오늘도 나는 살 것이다. 살아서 사랑할 것이다. 내일도 죽어가는 모든 것들, 쓸쓸하고 외로운 것을 위해 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에 관한 기록 (4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