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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10. 2021

이별에 관한 기록 (完)

1월 9일

1월 9일     


 이쯤에서 나는 이 지루한 기록을 끝맺으려 한다. 


 지난 오십 일간의 기록이 궁상맞은 건 물론이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할 만큼 답답했으리라는 점은 인정한다. 또 일부 흥미로운 관점으로 읽고 있을 이들에게 역시 이런 식의 결말이 아쉽고 당혹스러우리라고 예상하는 바다.


 터놓고 말하자면, 나의 바람 역시 그랬다. 이런 내가 이묵돌이라는 필명으로 처음 써낸 책, 『역마』에서처럼 시기적절하고 제법 드라마틱하기까지 한 결말이 제 발로 찾아오길 바랐다. 삼 년 전의 방황에서처럼 ‘여기서 끝내야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완전한 이별이나 새로운 만남, 경험으로서의 극복과 인간적인 발전 같은 사건으로 매조질 수 있었다면―당장 글로 써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훗날 누군가에게 이 추레했던 시간을 그럴듯한 소설처럼 떠들어대는 것에도 한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별은 끝이 아니며 시작도 아니다. 만남과 이별이라는 개별적 사건 자체는 그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내 생각이 사실과 다르다면…… 미안하다. 그런 시기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나이를 먹었고, 필수적인 판단력이나 감각을 영원히 상실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별 것도 아닌 토요일, 꽁꽁 얼은 슬로프에 넘어지면서 이젠 그만할 때가 됐다고 느닷없는 결정을 내버린 건 아닐지…….


 한편으로 나는 이 일련의 기록을 나 자신을 위해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쩌면 이 글의 첫 문장을 쓰기 훨씬 전부터 부정해왔던 것 같다. 


 이 글은 공개된 일기다. 문자화된 CCTV 영상이다. 가장 감추고 싶은 상처를 불필요하리만큼 꺼내 보이려한다. 하등 좋을 게 없는 짓이다. 대체 뭣 하러 이런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처음에 당신은 이 글의 목적이 폭로나 고발, 처절한 참회 또는 자기파괴 중 하나의 분명한 테마로 작성됐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맥락의 글이 열 편, 스무 편, 서른 편과 마흔 편이 넘게 쌓였다. 글을 쓰는 당사자도 그 의도가 분명치 않은데다가, 때때로 확신에 가득 차 보이는 묘사조차 수시로 뒤바뀐다는 것을 이제는 눈치 챘을 법도 하다.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사실은 누구도 나더러 이런 글을 쓰라고 시키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세상의 어떤 정신과 의사가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만약 그 비슷한 말을 지나가듯이 했다 치더라도, 이런 글을 쓰라는 뜻이 아니었다는 점은 확신할 수 있다. 당시의 내게는 “그럼 뭐라도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라는 의례적 언급이 “그 글을 쓰는 것밖엔 방법이 없어요”라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네가 떠나는 날, 나는 ‘지금 다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남은 이야기는 편지로 써 보내겠다’고 말했다. 비록 너는 무심한 투로 “그렇게 해”라고 대답했지만. 어쩌면 지금껏 네 언니의 집에 손으로 쓴 편지가 한 통도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제 아무리 무책임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지키는 약속 한두 가지는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내 경우에는 무언가 글을 ‘써주겠다’고 해놓고 영영 쓰지 않은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들, 한동안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다가 뒤늦게 보내준다고 한들 말이다. 다만 이런 부연설명이 지금 같은 상황에 퍽 어울린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 날, 네게 편지를 부치겠다고 한 날부터, 나는 단 하루도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보고 있다시피.


 내게는 나날이 너를 잊는 과정을, 결핍에 익숙해져가는 모습을, 목발 없이 내딛는 걸음마를, 내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자세하게 안내할 필요가 있었다. 슬프지 않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뒤늦게 그렇게 말해봤자 믿을 리 없었다. 심지어 네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더라도. 그게 허접한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만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가슴 아픈 헤어짐에 즈음해 으레 하는 말들…… ‘그래, 네가 날 버리고 잘 먹고 잘 사나 보자!’는 철없는 저주이고, ‘언제까지고 날 잊지말아줘’같은 건 대개 이기적이다. 때문에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일 것이 아니었다. 슬프지만 서서히 울음을 그쳐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끝났지만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내가 이해해가고 있다는 것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만 했다. 


 나는 네가 비극적인 미래를 맞이한 뒤 나와 보냈던 시간을 그리워하거나, 떠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거나, 반대로 영영 행복해져서 나를 떠올릴 겨를조차 없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바람이 없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가 사는 우주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종점일 줄 알았던 서로가 정류장이 된다. 고양이는 죽지 않고 고양이별에 갈 뿐이다. 


 모든 글에 마지막 문장이 있듯이, 우리의 인연에도 마지막 인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네가 내 글을 질릴 만큼 겪어온 관계로…… 어떤 작별을 건네면 좋을지 막막한 심정을 고백하고 싶다. 그렇지. 이미 출발했다면 돌아보지 말아야한다. 이천이십일 년 일 월 십 일 밤 열 시 이십칠 분. 나는 이 기록의 마지막을 울지 않고 작성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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