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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05. 2021

이별에 관한 기록 (45)

1월 4일

1월 4일.     


 스무 살. 태어나 처음으로 스키장에 가던 날, 새벽 다섯 시부터 시내 도로가에 서있었던 때를 기억한다. 팔차선 도로에는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그런 곳에 무슨 버스가 온다는 건지, 내 친구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다렸다. 그런 시절이었다. 버스를 놓치고 길을 잃을지언정 우리는 ‘같이 있었고’, 이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꼽 빠지는 추억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춥고 공허하고 까맣게 얼어붙은 도로위로…… 스키버스 한 대가 두 갈래로 헤드라이트 불빛을 뿜으며 다가왔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오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고, 내 소유의 스노우보드와 가방과 옷을 챙겨 자가용 조수석에 올랐다. 스키버스가 아닌 차를 타고 스키장에 가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차 안에서 갈아입으면 사람과 닿을 일이 없으니까요.” 동행한 사람이 원주까지 바쁘게 차를 몰고 나서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트렁크에 실려 있는, 눈길에 아주 잘 미끄러지도록 설계된 판때기를 타러가는 것이지, 누군가를 만나고 악수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내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부단히 노력해서 어떤 일 하나를 능숙하게 할 무렵이 되면,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을 수 있는 내가 되리라고 믿었다. 지금? 지금에 와서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싶다. 사랑은 자격이 아니다. 초급자 코스에서도 수십 번 넘어지던 사람이, 최상급자 코스를 무난히 내려오게 된다고 해서 없던 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더욱이 그렇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재능을 타고 난 것이다. 아무리해도 미워할 수밖에 없다면 저주받은 삶이나 마찬가지고.


 일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오전 권을 끊어 오후 한 시까지 타고 돌아왔다. 날씨는 좋았다. 우리는 시속 백 몇십 킬로로 달리는 차 안에서, 슬로프를 기어오르는 리프트 위에서, 그길로 돌아와 함께 내가 사는 동네의 분식집에서 식사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예전의 자신이 겪었던 이별이며 지금 몸담고 있는 건설업 현장에 대해서도 조금 들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 난로를 땔 때의 시간이 네 시 반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까무룩 졸긴 했지만, 어제부터 제대로 잠을 못 잔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매우 피곤했다. 신체활동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다소 무리해서 턴을 해대는 바람에 오른쪽 허벅지 안쪽이 쑤셔댔다. 곧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듯 정신이 아찔했다. 어쩜 지금이라면 수면제 없이도 깊이 잠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착각이었다. 대강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워봤지만, 전신의 피로함만 여실히 느껴질 뿐 의식이 사라지질 않았다. 결국에는 한 시간이나 뒤척대다가 일을 해보겠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고 말았다. 좋아, 그럼 어떤 일을 할까. 다음 주에 있을 특강 자료를 미리 만들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과거에 썼던 폰트 디자인을 조금 손보고, 내용을 하나둘 채워 넣다가 보니 시야가 흐릿해졌다. 손가락 끝에도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쓰러질 만큼 피곤하기는 한데 잠은 못 자겠으니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약을 두 알 삼켰다. 침대에 기대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새벽 내내 손발이 차가웠다. 그래서인지 영 좋지 않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의 나는 온 몸이 얼어붙었고, 날 알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졌다. 끝내 그렇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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